▲ 골든부트와 골든볼을 들고 있는 여민지(왼쪽)와 우승컵을 들고 있는 김아름.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 21명 전원이 주인공
최근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막을 내린 U-17 여자월드컵 우승의 일등공신으로 여민지(17·함안대산고)를 꼽는 데 주저할 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맞는 얘기다. 여민지는 대회 출국에 앞서 “8골을 넣고 싶다”고 했고 그녀의 약속은 지켜졌다. 나아가 우승까지 천명했던 최덕주호의 목표가 더 이상 꿈이 아닌, 진짜 현실이 되며 더욱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됐다.
이들의 귀국길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란 표현이 어울렸다.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의 위업을 올린 2010남아공월드컵 때 못지않은 엄청난 인파가 지난달 28일 귀국 기자회견이 열린 인천국제공항에 몰려들었고, 당시 행사는 공중파 및 케이블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선수들이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예상한 것처럼 대부분의 시선은 여민지에게 쏠렸다. 이날 행사 사회를 맡은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취재진의 질문들이 일방적으로 쏠리는 걸 막고 최대한 고루 배분되게 하려 애를 썼지만 여민지에게 아무래도 많은 질문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대부분 방송 카메라들은 겹겹이 쌓인 팬들과 포토라인 탓에 딸 곁으로 가지 못한 채 먼발치에 머물던 여민지 부모와의 인터뷰 스케치를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이를 놓고 마냥 부정적 시선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선수 학부모들 및 여자 축구인 다수가 이러한 ‘쏠림’ 현상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20세 대표팀의 지소연(한양여대)의 경우에서 경험했듯이 세간의 관심이 아무래도 스타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일말의 서운함은 털어놓았다. 나머지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관심으로 입을 수 있는 심적 상처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공항에서 만났던 선수 A의 어머니는 “(여)민지가 정말 큰일을 해냈다는 걸 알지만 묵묵히 맡은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해준 이름 없는 선수들도 함께 기억해줬으면 한다. 엔트리에 포함됐던 21명 전원이 주인공이 아니냐. 딸이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혹여 마음 아파할까봐 우려스럽다”고 했다. 선수 B의 아버지 역시 “스포츠가 재미있는 까닭은 스타플레이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U-17 여자월드컵이 유독 재미있었던 것은 여민지가 있어서였고, U-20 여자월드컵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지소연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두 명에 모든 초점을 두는 것보다 다양하고 고른 시선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여러 제자들을 키워낸 모 학교의 감독도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축구의 특성상 공격수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세태 때문에 쓸 만한 수비수나 골키퍼 요원을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환경도 열악한데 관심도 받지 못할 바에 축구를 딸에게 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를 의식한 듯 여자대표팀 최인철 감독도 대회 기간 중 여민지의 활약을 평가해달라는 스포츠 기자들의 코멘트 요청을 받을 때마다 “(여)민지의 파괴력도 놀라웠지만 득점과 거리가 먼 포지션을 맡은 다른 동료들의 묵묵한 헌신과 서포팅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선전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반복해 말해왔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여민지가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함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여민지는 사상 첫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대회 우승, 골든부트(득점왕), 골든볼(MVP)까지 모조리 휩쓴 것에 대한 소감을 기자들이 묻자 “작년 16세 이하 아시아 선수권을 준비하면서부터 함께 시간을 보낸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다”고 모든 공을 동료들에게 돌리는 태도를 취해 갈채를 받았다.
▲ U-17 여자축구대표팀의 축하연 및 해단식이 열린 가운데 이금민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지금은 뜨거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가 확 가라않으리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축구계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가 허탈감과 공허함으로 이어져 자칫 선수들의 성장과 발전에 큰 해를 끼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제기된다.
출범 두 시즌째를 맞은 국내 유일의 여자 실업축구리그 WK리그 챔피언 1, 2차전이 각각 부산과 울산에서 태극소녀들의 귀국 환영식 전후로 열렸으나 분위기는 기대만큼 뜨겁지 못했다. U-17 여자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대부분이 WK리그의 존재를 모른다는 결과가 나와 아쉬움을 더했다.
U-17 여자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캡틴’으로 동료들을 인솔했던 김아름(17·포항여전자고)은 “지금의 성원과 관심이 한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사랑이 됐으면 한다”며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으나 현재의 관심이 계속 이어지리라고 보는 이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다.
측면 미드필더 김나리의 어머니 김효선 씨(49)는 “남자축구만 봐도 금방 달아오르고, 쉽게 식어버리는 모습에 워낙 익숙해 후유증은 크지 않으리라 보지만 솔직히 부모의 입장에서 텅 빈 관중석을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경기를 해야만 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편할 리 없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중앙 미드필더로 일본과 결승전에서 첫 골을 넣은 이정은의 어머니 김미자 씨(51)도 기왕이면 U-20 여자월드컵에서 한 번 달아오르고, 멈춤 없이 U-17 여자월드컵을 통해 한 단계 높이 도약한 지금의 분위기를 계속 이어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최덕주 감독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지속적인 관심 ▲계속되는 투자 등을 여자축구의 필수과제로 꼽았다. 여자축구의 수준이 분명 17세 대회를 통해 높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장 인프라가 떨어지는 종목이기에 ‘반짝 관심’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세계 3위를 차지한 U-20 여자월드컵이 끝난 뒤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제언들이 쏟아졌고 여자축구 전문가들의 여러 가지 발전 방안 등이 많이 거론됐지만, 특이할 만한 액션이 취해진 것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가지 분석들과 엄청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은 “어렵고 열악한 여자축구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대학 팀과 실업 팀을 확충시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여자축구계가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은 ‘장황하고 그럴싸한’ 포장이 아닌, ‘진솔하고 확실히 가능한’ 약속의 실천이다.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달아오른 지금이 여자축구의 발전을 꾀할 적기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뛰자니 몸이 울고 쉬자니 팀이 울고
“우리 딸이 좀 쉬었으면 좋겠지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큰 기적을 일으키고 당당히 개선한 17세 태극소녀들이지만 여전히 스케줄은 빡빡하기만 하다. 달콤했던 귀국 행사를 모두 마치고 소속 학교로 복귀해 일상으로 돌아간 어린 여전사들. 부모들은 딸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쉴 틈은 없어 보인다.
당장 코앞에 닥친 것은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권 일대에서 열릴 전국체전이다. 여자축구 고등부는 함안스포츠타운에서 치러질 계획.
일단 함안에 계속 머물며 자웅을 겨룬다는 이점이 있으나 미국 전지훈련을 포함해 거의 두 달 가까이 태극마크를 달고 뛰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데다 한참 동안 동료들과 손발을 맞추지 못해 기량 제대로 보여주기 어렵다.
그렇다고 팀 사정상 전력의 주축을 이루는 대표팀 멤버들을 제외할 수 없다. 각 지자체는 전국체전에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에 에이스가 빠진 경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여자축구는 선수층이 얇아 특정 포지션에 특정 선수가 빠질 경우, 그 자리를 메우기도 벅차다. 당연히 선수들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뛰어주길 바란다.
학부모들도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 딸에게 휴식을 주면 팀이 어려움에 빠지고, 팀을 위하면 딸이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일단 출전 여부는 선수 개인의 의사가 더욱 크게 작용하지만 팀이 온통 비상 체제에 돌입한 상황을 뻔히 보면서 어떤 바보가 ‘쉬고 싶다’고 말하겠느냐. 협회와 여자축구연맹 차원의 배려가 아쉬웠다”는 게 다수 학부모들의 반응이었다.
여자축구 지도자 처우 실태
월급은 ‘찔끔찔끔’ 자리는 ‘간당간당’
17세 태극소녀들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최덕주 U-17 여자대표팀 감독은 귀국 후 열린 인터뷰에서 “축구협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나는 매우 행복한 지도자였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어진 말에도 뼈가 담겨 있었다. “17세와 20세 여자대표팀 모두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모두 풍성한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금 현장의 초·중·고 지도자들은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고생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는 정확히 맞는 얘기였다. 대다수 아마추어 축구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 대개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고 있어 신분이 불안하다. 교직원과 교사 자격을 부여받은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생활고는 당연지사. 쥐꼬리만 한 봉급에도 황송하다. 모 초등학교 남자 축구 감독은 세금을 제하고 150만 원가량 월급을 받고 있다.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들의 경우 이보다 훨씬 열악해 120만 원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남자 축구가 이 모양인데 더욱 어려운 환경으로 알려진 여자 축구 지도자의 처우가 좋을 리 없다. 전체 사령탑 비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감독들과 코치들은 학부모들이 걷어서 모아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자연히 지도자들은 촌지, 뇌물 등 금전적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행을 끊기 위해서라도 일선 지도자들의 처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한 초등학교 남자 축구부 A 감독은 “유소년 육성의 명목으로 만들어진 K리그 클럽 산하 학교 팀이라면 모를까. 일선 학교 상당수 아마추어 감독들은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 언제든 원하면 ‘잘라낼 수 있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정규직이 아니다보니 학교나 월급을 모아 만들어주는 학부모가 ‘짐 싸 나가라’고 하면 떠날 수밖에 없는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라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축구협회는 작년부터 시행해온 주말 리그제에 참여하는 학교 팀들에 한해 매달 50만 원씩 연구비를 지급하고 있지만 지도자들의 생계 개선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축구계 일각에서는 일선 지도자들 처우 개선의 일환으로 본인 부담과 축구협회 보조를 적절한 비율로 나누어 일정 기간 납입 후 추후 일정한 금액을 연금처럼 받는 지도자 연금보험 도입을 제안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