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해군군속 신상조사표. 조선인의 사망을 ‘전사’와 ‘전지 사망’(총살, 자결, 자살)으로 구분지어 기록한 부분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무차별하게 살해되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원장 오병주)는 지난 9월 5일 ‘밀리환초 조선인 저항사건과 일본군의 탄압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6년 11월 7일부터 장장 3년여의 연구 결실이 담긴 이 보고서에는 잔혹한 일본군의 행태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초 중서태평양 마셜제도의 동남쪽 끝 밀리환초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식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밀리환초에는 조선인 군무원과 원주민을 포함해 5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 개막과 맞물린 남양군도 군사기지화를 위해 이주된 사람들이었다. 밀리환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의 최전방으로 미군의 폭격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미군의 공격으로 보급이 차단되자 일본군과 조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 보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현지 자활’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밀리환초는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먹을거리는 언제나 부족했다.
현지 자활이 추진되고 있던 1945년 2월 마지말 날 밤이었다. 박종원, 김철남 등 조선인 수십 명이 야자수 덤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일본인을 유인하러 간 동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꼭 쥐고 있었다. 박종원 등이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하기로 한 것은 며칠 전 목격한 장면 때문이었다. 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이인신 씨는 박종원 씨가 경험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박종원 씨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인가 일본인이 조선인의 숙소로 ‘고래고기’라고 하면서 인심 쓰듯 주고 갔다. 상호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아마도 큰 고기를 잡아 조금 나누어 준 것도 같고, 잔뜩 허기진 판에 잘 먹었다고 한다. 며칠 후 박 씨는 동지 몇 명과 고기를 잡기 위해 체르본섬과 가까운 무인도에 갔다. 거기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체 한 구였다. 자세히 보니 살점을 도려낸 조선인이었다. 박 씨는 직감적으로 전날의 일이 떠올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 이인신 씨. |
식인 사건에 분노한 120여 명의 조선인들이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저항을 계획했다. 그들은 일본인을 한 명씩 야자수 덤불로 유인해 흉기로 살해했다. 당시 조선인을 감시하던 일본인은 총 11명이었다. 하지만 7명을 살해했을 때 다른 4명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거사에 성공했다고 여긴 조선인들은 이튿날 미군에 투항하려 했지만 날이 밝자 그들을 찾아온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들이었다. 루크노르섬에서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일본군 토벌대 15명은 도착하자마자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100여 명이 희생됐다. 박종원 씨의 증언에 따르면 120여 명의 조선인 중 생존자는 부상자 2명을 포함해 15명뿐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는 다이너마이트를 껴안고 자폭하기도 했다. 이때 일부 조선인이 야자수 나무 위로 피해 목숨을 건졌는데, 이들의 증언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이 사건이 공개될 수 있었다. 이인신 씨에게 체르본섬의 저항과 학살 사건을 전한 박종원 씨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씨는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했다. “3월 1일 (미군의) 배는 오지 않고 이웃 섬에서 느닷없이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조선인들은 정신없이 혼비백산했다. 일부 조선인은 다이너마이트 대용품 발파로 자폭해 비장하게 최후를 맞았다.”
당시 일본 정부가 만든 조선인 군무원의 반란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에는 조선인 군무원들의 ‘반란’과 ‘토벌’에 관한 사항이 다수 발견된다. 이 중 조선인의 사망을 ‘전사’와 ‘전지 사망’(총살, 자결, 자살)으로 구분지어 기록한 부분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무차별하게 살해되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또 이 문서에는 ‘한인들이 한 섬(체르본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라고 명기해 놓은 부분도 조선인의 학살을 증명하고 있다.
‘식인사건’ 연구를 진행한 조건 전문위원은 “저항 사건의 발단이 된 ‘식인 사건’은 증인들의 회고 기록만 존재해 실증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정황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오랜 조사와 연구끝에 사실로 판명됐다”며 “특히 학살 사건은 많은 증거 기록이 있기에 더욱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이에 대해 “밀리환초의 식인사건은 독특한 정신주의와 결부된 일본군 내의 가혹한 풍토, 현지 자활의 발단이 된 기아 상황과 미군이 가하는 압박과 전쟁 스트레스가 가해져 일어난 것 같다”고 진단했다. 남양군도 워체섬, 필리핀 등지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증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비단 밀리환초 조선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10월 7일 기자와 만난 조건 위원은 “밀리환초 식인 사건 조사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입은 피해를 밝히는 일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며 “50년대 한·일 협정을 준비하면서 조선인 피해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이라도 조사가 이루어져 다행이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유사 사건을 더 조사할 시간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이번 조사의 뿌리인 특별법의 효력은 내년 말에 소멸될 예정이다. 필요에 따라 6개월씩 두 차례 연장이 가능하지만 조선인 피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짧다는 지적이다.
우선미 기자 wihts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