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관욱 8단 |
지난 9월 24일에 있었던 해프닝. 벌써 꽤 된 일인데, 일주일 이상 폭발적으로 화제를 독점했다. 지금도 여진이 있어 사건의 현장에선 연기가 나고 있다. 시니어 프로기사와 여성 기사들이 연승전으로 겨루는 제4기 지지옥션배 17국, 시니어 안관욱 8단과 여성 신예 김윤영 초단의 대국. 안 8단이 백. 안 8단은 1961년생, 91년 입단. 김 초단은 1989년생, 2007년 입단. 입단 20년차 대 4년차.
이번 지지옥션배는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여성 신예가 계속 리드했는데, 안 8단이 등장해 열아홉 꽃다운 아가씨 이슬아 초단, 스물다섯 이다혜 4단을 연파, 2연승으로 승부의 물길을 바꾸던 참이었다. 안 8단은 제3기 때 무려 6연승을 올려 시니어 팀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었다. 안 8단은 입단이 좀 늦고, 지금은 대전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지만, 아마추어 시절부터 원체 실력이 있고 미남인 데다 과묵하고 중후한 인품으로 3박자를 고루 갖추었다는 평을 받던 사람이다. 별명이 ‘반상의 신사’다.
1988년 <월간 바둑>이 기획했던 ‘프로-아마 오픈전’이란 게 있었다. 프로와 아마가 호선으로 겨루어 보자는 것,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거기서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발굴한 천재라는 후광과 실제로도 욱일승천하던 이창호 소년을 아마추어 안관욱 청년이 제압한 것.
▲ 김윤영 초단 |
그런데 잠시 후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바둑TV 생중계를 지켜보던 팬들이었다. 김윤영 초단이 계가를 할 때 잡은 백 돌 하나를 백의 옥집에 메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의 반집승이 아니라 흑의 반집승이라는 것이었다. 비디오 판독 결과 팬들의 항의가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입회인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계가 확인 후 즉시 대국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승패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엔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흑이 이긴 것으로 해야 마땅하다는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곤혹스러운 것은 안 8단이었다. 안 8단은 제18국에서 김혜민 6단(24)을 꺾고 4연승. 그리고 5연승을 바라보는 제19국, 루이나이웨이 9단과의 대국을 기권했다. 그 나름으로 찾은 최선의 수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수는 실수고 룰은 룰, 선수로서 일단 룰을 따르고, 단체전의 멤버로서 책임량 완수에 최선을 다한 후, 딸 같은 김윤영 초단과 바둑팬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한 것.
지지옥션배는 제한시간 10분에 40초 초읽기 3회의 초속기 대회. 비몽사몽 초읽기 속에서 진땀을 흘리다 바둑을 다 두고 나면 정신이 없다. 안 8단도 김 초단도 그랬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이런 경우를 상정해 룰을 완벽하게 정리해 놓지 않은 한국기원이 말을 좀 들을 수 있지만, 한국기원도 사실 조금은 억울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경우까지를 상정한단 말인가.
옛날에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작고한 다카가와 가쿠 9단과 린하이펑 9단의 대국이었다. 다카가와 9단은 ‘본인방’ 9연패의 금자탑을 세웠던 인물. 후배 사카다 에이오가 쾌도난마로 치고 올라오던 시절이었지만, 다카가와의 본인방은 난공불락이었다. 린하이펑은 물론 한창때였다. 바둑은 린하이펑의 비세. 그러나 다카가와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중반의 고비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형세는 역전되었고 이후 몇 수를 더 두다가 다카가와는 쓰러지고 말았다.
대국이 중단된 채 다카가와가 병원으로 실려간 후 린하이펑은 기록원에게 다가가 다카가와가 실수하기 직전의 장면을 가리키며 “기보를 여기서 끊고 다카가와 선생이 불계승한 것으로 처리하라”면서 기록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건강이 좋지 않은 선배를 상대로 무리하게 버틴 것은 승부 이전에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두고두고 린하이펑의 인간됨을 얘기할 때 소개되는 일화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젊은 선수가 예도를 보여 준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8월 28일 경남 함양에서 열린 ‘노사초배 바둑대회’, 시니어 K 7단과 연구생 출신의 주니어 박종욱 7단의 대국. K 7단은 대국 시간에 좀 늦었고, 대국이 시작된 후에는 몹시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표정으로 몸을 비비꼬다가 거의 5분 간격으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심한 복통이었다. K 7단이 화장실에 가든 다른 볼일을 보러 가든 박종욱 7단은 자신이 착점을 하면 계시기를 누르면 된다. 관전객들은 배 아픈 사람 사정이야 어찌됐든 “박종욱의 시간승”이라면서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박종욱은 K 7단이 화장실에 가면 자신이 착점을 하고서도 자신의 시계를 누르지 않고, 시계를 정지시켰다가, K 7단이 돌아오면 눌렀다. 웃지도 않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참고로 최근에 알게 된 대국 예절 한 가지. 계시기는 백을 든 대국자의 오른편에 놓인다. 백을 든 대국자는 오른손으로 착점을 하고 시계를 누른다. 쉽고 자연스럽다. 흑을 잡은 대국자는 오른손으로 착점을 하고 오른손으로 시계를 누르려면 팔을 대각선으로 뻗어야 한다. 오른손으로 착점하고 왼손으로 누르면 쉬운데, 왜? 그건 안 된다는 것. 착점한 손으로 시계를 누르는 것이 룰이요, 예절이라는 것. 전자와 후자는 1초쯤 시간 차이가 난다. 흑을 잡은 대국자가 초읽기에 몰리는 경우, 그 1초는 크다. 요즘도 여전히 다급하면 오른손으로 두고, 아니 돌이 채 바둑판에 놓이기도 전에 왼손으로는 시계를 누르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공식 대국에선 그걸 어필할 수 있고, 상대는 실격패가 되는 것.
바둑의 스포츠화. 바둑이 예도와 스포츠의 경계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뜻하지 않은 얘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재미도 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우아하지는 않을 뿐. 물론 그윽하지도 않다. 그윽한 동양화와 역동적(?) 스포츠 혹은 요란한 e-게임. 각자의 취향과 기호에 맡길 일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