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광주 광천동 영풍문고 유스퀘어점에서 한 직원이 <김대중 자서전>을 진열대에 배치하고 있다. 뉴시스 |
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의 책 발간 소식을 접하는 대기업들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다. 재계 관계자들은 ‘유명 정치인의 자서전 발간=정치자금’이라는 공식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서전을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국내 10위권 대기업 고위 임원들을 통해 정치인 자서전 의무 구매 관행 및 이로 인해 기업체들이 겪는 딜레마 등을 들어봤다.
“작은 기업체는 모르겠지만 10대 기업에게는 유명 정치인들의 자서전 의무 구입은 이미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정치인들의 자서전을 사주는 것이 정계 인맥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삼성 비서실에서 근무하다 최근 외국계 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 김 아무개 이사(45)의 전언이다. 그는 그리 큰일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유명 정치인들은 자서전을 펴낼 때마다 대기업 측에 발간 소식을 알린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이 자서전을 많이 내고, 이런 경우 기업 측이 구매하는 책의 양도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홍보용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대량구매다.”
기자는 이 제보를 듣고 이것이 사실인지 타 기업체 임원들에게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재계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A 그룹의 이 아무개 부사장(55)은 “우리 그룹도 정치인들이 자서전을 발간할 때마다 매입을 했다”며 “우리로서는 큰 부담도 아니고, 정치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차원에서 구입을 했다”고 털어놨다.
또 B 그룹 계열 건설사 임원인 박 아무개 씨(51)는 “법령상 거액의 후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10대 기업들은 자서전 매입을 거의 다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로 말했다.
그렇다면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정가 5만5000원)은 어떨까. 지난 7월 28일 발간된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은 <김대중 자서전>이란 제목으로 삼인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이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과는 달리 그의 자서전은 둘째 아들인 홍업 씨의 처가 쪽 인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두 권이 묶음인 자서전은 초판 2만 질 매진에 이어 일주일 만에 3만 질 판매를 돌파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10월 15일 기준)이지만 7만 5000여 질이 팔렸다. 낱권으로 계산하면 15만~16만 권이 팔린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사랑과 관심에 비춰볼 때 당분간 판매 부수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B 그룹 임원 박 씨는 “<김대중 자서전> 판매 부수에는 대기업이 대량으로 사들인 분량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대중 자서전>이 출간된 뒤 (사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DJ 측근과 친분이 있는 회사 임원이 받은 것으로 안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책을 내면 여러 차례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동교동계 인사들이 자서전 판매에 적극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박 씨에 따르면 10대 기업이 2000부씩만 매입했다고 해도 2만 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 자서전> 총 판매량의 1/8에 달하는 수치로 자서전 매입에 기업당 약 1억 1000만 원 정도를 사용한 셈이다.
이들 재계 인사들의 말을 정리해 보면 현재 대기업들의 유명 정치인 자서전 ‘의무 구입’은 ‘상(商)례’로 굳어져 있는 상황이다. 거래 부수는 최소 2000부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치인, 특히 대선을 앞둔 대권주자나 유명세를 타는 정치인들이 자서전을 발간하면 기업 측은 ‘지인’이라는 혹은 ‘상례’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서전을 구입한다.
그렇다면 정치인과 기업 간에 자서전 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재계 관계자들은 그 이유로 ‘정치자금 수수’를 꼽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자금이 필요하고,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에게 일종의 ‘보험’을 드는 차원에서 책을 매입한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정치 후원금’은 그 상한이 정해져 있고, 기록이 남아 정치인이나 기업인 모두에게 불편한 시스템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자서전 매매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소통 하는 매개 역할로 악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책 매매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모두에게 적법하고도 원활한 자금 거래 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외국계 기업 임원인 김 씨는 “기업들은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사업 영역을 높이기 위해 언론사에 거액의 돈을 주고 광고를 한다. 이런 광고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게 유력 정치인과의 관계 형성이다”라며 “기업 측에서는 정치권에 자금을 전달 못해 안달인데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냐. 1억 원 정도의 돈으로 정치권에 보험을 드는 것은 기업으로서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의 관계처럼 자서전 매입의 이면도 존재한다. ‘한쪽 정당 자서전만 사주면 다른 쪽이 신경쓰여 똑같이 매입하기 때문에 자금이 두 배로 든다’는 것이다. 야당 정치인 자서전을 사줬으면 여당 정치인 자서전도 사줘야 형평성 논란을 차단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씨는 “<김대중 자서전>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현 정권에 밉보이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됐었다”며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그렇게 눈치를 보며 사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유명 정치인 자서전 강매 의혹과 관련해 정치권이나 기업 측은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 비서 출신인 김경재 전 의원은 “절대 아니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강매 의혹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모략일 것”이라며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이런 발언 자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가족들이 먹고 살기 궁핍한 것도 아니고,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마당에 정치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A 그룹 홍보실 관계자도 “회사 차원에서 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치인들의 자서전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 그걸 사겠나. (임원이나 최고경영자가) 개인적으로 구매했다면 모르겠지만…”이라며 강매 의혹을 부인했다.
우선미 기자 wihts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