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검거된 정 씨는 여러 곳의 PC방을 전전하며 LG트윈스 선수들에게 문자를 보낸 뒤 바로 자리를 뜨는 방법으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왔다. |
프로야구 선수 A는 경기 후 전송된 문자 메시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대하기 어려웠던 선배 선수가 보낸 문자였던 것. 역전 기회를 살리지 못해 무거운 마음으로 타석에서 내려온 그였기에 충격은 더했다. 이후 A는 경기 중 작은 실수라도 할 때면 제일 먼저 그 선배 눈치를 보게 됐다. 구단 관계자 B 씨 역시 문자 메시지 한 통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불쾌했다. ‘개막장 프런트야, 그딴 식으로 하려면 관둬라’는 내용의 문자가 전송돼왔던 것. 게다가 평소 아끼던 선수가 보낸 문자였기에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뿐만 아니다. 거의 모든 선수, 구단 관계자들이 영문 모를 문자 때문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간질 문자’는 두 시즌 동안 계속됐고, 특히 팀 성적이 좋지 않을 시기엔 더욱 극성을 부렸다.
실마리는 엉뚱한 데서 풀렸다. 협박, 음란 메시지를 받은 일반인 박 아무개 씨가 광진경찰서에 진정을 넣은 것. 정 씨는 프로야구 선수들 30여 명 외에 일반인 50여 명에게도 타인의 인적 사항을 도용해 1만여 건의 협박, 음란 메시지를 보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광진경찰서 사이버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정 씨를 검거할 수 있었고 그가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괴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이버팀 조영세 경위는 “워낙 수법이 치밀해 검거에 난항을 겪었다. 경찰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여러 곳의 PC방을 전전했고, 문자 메시지를 전송한 뒤 바로 자리를 떴다. 본인 명의로 가입된 사이트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자주 다니는 PC방에도 회원 가입을 해놓지 않았더라”고 설명했다. 수시로 문자 전송 기록을 삭제하고 IP 추적을 차단하기도 했던 정 씨였기에 대형 서버를 구축해 놓은 컴퓨터 전문가로 예상했다고. 그러나 정 씨의 집엔 데스크톱 컴퓨터 한 대가, 그의 자동차에선 80여 명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달랑 나왔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 씨는 어떻게 LG 선수, 구단 관계자들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을까. 정 씨는 “번호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며 입을 열었다. “잠실야구장에 가면 LG구단 관계자를 위한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자동차에도 LG로고 스티커를 부착해놓는다. 선수들 대부분이 자동차에 휴대폰 번호를 붙여놓고 다니기 때문에 주차하길 기다렸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번호를 적어갔다. 일반인의 경우 주택가나 거래처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영수증이나 문서에서 주민등록번호와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가 확보한 인적사항 중에는 유명 연예인의 주민등록번호도 있었다. “술집에서 우연히 유명 연예인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만나 인적사항을 알아낸 적도 있고, 인터넷에 연예인들 주민등록번호가 한창 돌아다닐 무렵 이를 전부 저장했다가 메시지 전송할 때 사용했다”는 정 씨는 범행을 저지를 때 네이트온 문자 보내기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공공장소에서 누가 네이트온 아이디랑 비밀번호를 입력해놓고 그냥 가버렸다. 그때 알게 된 아이디를 이용해 문자를 보냈다”고 얘기한다.
정 씨가 처음부터 ‘괴문자’를 계획한 건 아니었다. 지난 시즌 막바지, LG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을 때 충동적으로 문자를 보내게 됐단다. “오래전부터 불만이 쌓여왔다. 레전드 선수들을 버리고 큰돈 써서 들여온 선수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질 못했다. 트레이드도 그렇지만 선수기용 방법도 이해가 안되더라.”
정 씨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평일 저녁, 주말을 이용해 1년에 30번 정도 야구장을 찾아 LG를 응원한단다. 정 씨가 야구장에서 직접 응원을 할 때 LG가 극적으로 이기는 경우가 많아 더 가게 됐다고. 이토록 LG 골수팬인 그가 문자로 인해 혹시 구단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걸까.
그는 “머릿속에선 보내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경기에서 지고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문자로 상처받은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 평생 내 죄를 잊지 않겠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앞으로 다신 이런 일 없을 거라 약속드린다. 다음 시즌, LG의 16년 만의 우승을 위해 더 열심히 응원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 씨의 ‘이간질 문자’를 받은 LG구단 분위기는 어땠을까. LG구단 관계자는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땐 모두 놀랐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뒤 차량 이동 중에 한 선수가 바로 옆자리에 앉은 선수 번호로 협박성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확인 후 다른 사람이 선수들 번호를 도용해 문자 보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엔 단순한 장난으로 보고 모두 대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광진경찰서 사이버팀 조 경위는 “공개된 장소에서의 인터넷 접속 시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인적사항이 기재된 문서, 우편물은 확실히 폐기하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정 씨 외에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협박 문자를 보낸 이가 또 있다고 들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