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장기영 IOC 위원(가운데)과 필자가 함께 자리했다. |
장기영은 1916년 서울 출신으로 1934년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선린상업은 사립이지만 일본인-한국인이 섞여서 공부하는 학교였고, 또 야구명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광복 후 1950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뛰어난 수완으로 조선일보를 재건한 뒤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래서 그가 거쳐 간 많은 의미 있는 자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 사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은 참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1957년 광교 근방에 TV방송국을 열기도 했다. 아쉽게도 화재로 없어졌는데 KBS가 5·16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산에 개국했으니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영의 식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기영은 한국일보에 이어 1960년에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그리고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했다. 모두 최초로 한국신문사에 한 획을 그은 일들이었다.
특히 일간스포츠 창간 때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청와대에 있었던 까닭에 필자에게 도움 요청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음으로 양으로 많이 지원했다. 이때 계창호가 수고를 많이 한 기억이 난다. 1973년 5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는 일간스포츠의 이태영 기자(그 후 중앙일보 부국장)가 담당하여 일간스포츠 1~2면을 독점, 선수 사진까지 모두 실은 일이 있었다. 이때는 축구의 장덕진 회장이 막 달릴 때라 태권도는 왜 못하느냐는 식으로 의욕적으로 해내곤 했다. 당시 이태영 기자는 밤을 새우며 기사를 썼다.
유난히 한국일보에는 필자의 중학교, 대학교 동문들이 많이 있었다. 이태영 기자도 여권 발급에 부친(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유명한 이길용 기자) 문제로 하자가 있다고 해 필자가 보증을 서서 해결해 준 바 있다.
제일 처음 떠오르는 일은 5·16 군사혁명 기간 중 독일 뮌헨의 서커스단을 서울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무엇이든 잘 안 될 때인데 공보부가 도와주어 서울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한국일보는 곧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만들어 한국의 여성미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나섰다.
미스코리아는 얼굴만 예뻐서도 안 되고, 체격, 국제성, 장기, 어학 등 종합적인 미(美)를 갖추어야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 당시 어려운 국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들은 미스 유니버스,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월드 등의 국제대회에 나가 5위 이내에 입상하는 사람도 나왔다. 미스코리아들의 국제 활동과 인연이 생긴 필자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운영위원장이란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축사도 하고 한국일보 계획대로 지원해주는 일이다. 필자가 맡은 것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문제가 생겨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전격적으로 위촉된 것이었다.
▲ 1977년 장기영 IOC 위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국기원을 방문했다. |
장기영 IOC 위원이 늘 KOC 행사에 와서 축사를 한 까닭에 김택수 위원장과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인 필자는 자주 만났다. IOC 위원은 원래 KOC(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IOC를 대표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IOC 위원에게 자기나라 권익 대변이 우선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심지어 한국은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사마란치는 장기영 사망 후에도 동기생인 장기영 일가와는 인연을 올림픽을 통해 유지했다. 사마란치는 장기영 묘소에도 찾아갔는데 몇 년 후에 장강재 회장이 사망하자 다시 이 묘소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장재구, 장재국, 장재근 형제들과 장강재 회장 부인(문희)은 신라호텔에서 대접했고,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장재국 사장을 귀빈으로 초청하기로 했다. 또 88올림픽이 인연이 돼 코리아타임즈의 정태연 사장을 IOC의 신문분과위원으로 위촉한 바도 있다. 늘 사마란치는 장강재같이 인품이 좋은 사람이 IOC 위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장강재 회장은 사양했다. 툭하면 IOC 위원이 되겠다고 자가발전들을 하는 요즘과는 참 달랐다.
지금 로잔의 IOC박물관에는 어려운 가운데에도 100만 달러를 기부한 코리아타임즈, 한국일보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현관벽에 부착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장기영 IOC 위원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100만 달러를 낸다고 해서 모두 흉상이 있는 것은 아닌데 장강재 회장의 효심을 사마란치가 받아들인 것이다. 사마란치가 로잔에 IOC박물관을 지을 때 필자에게 장강재 회장에게 기부를 부탁해 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만나 상의를 했더니 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장기영 위원의 흉상제작과 운반 등 실무는 정태연 사장이 처리했다.
장기영의 호는 백상이다. 체육을 중시했던 고인의 뜻을 따라 한국일보는 백상체육대상을 매년 수여하는데 필자도 축사하러 매년 갔고 이승엽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 대부분이 백상체육대상 수상자 출신이다. 또 백상예술대상도 있어 연예인들에게 영광을 주고 있다. 지금 백상예술대상은 어마어마한 갈라쇼(Gala Show)가 되었는데 백상체육대상은 그렇게 국가의 이름을 빛낸 선수들에게 큰 영광을 주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술대상이 부럽기도 하고 체육대상의 미흡함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백상체육대상이 계속 이어져 고맙기만 하다. 필자도 88서울올림픽 후에 아호 윤곡(允谷)을 따서 ‘윤곡여성체육대상’을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76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필자는 KOC책임자로 뮌헨공항에 도착하게 됐다. 그런데 알래스카의 강설로 비행기가 다섯 시간이나 지연돼 파리서 갈아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뮌헨 도착은 밤 8시쯤이 됐다. 그런데 우리 태권도 사범들과 함께 장기영 IOC위원이 서서 기다리고 있어 놀랐다.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기영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다. 이때 함께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갔다. 호텔은 인스부르크와 티롤이 있었는데 하나는 IOC, 하나는 NOC호텔이었다. 필자를 호텔 조찬에 초대하기도 한 장기영은 매일 오징어를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한식을 달라고 했는데 마침 주위에 한식당도 없었다. 그래서 태권도 사범인 이경명이 매일 아침은 한식을 준비해 드렸다.
곧이어 76년 여름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1회 하계올림픽이 있어 김택수 KOC 위원장과 필자는 한국선수단 60명을 끌고 몬트리올로 갔다. 한 번은 IOC는 A, NOC는 B 카드가 귀빈석에 앉게 돼 있는데 장기영 위원과 김택수, 필자가 지정석에 앉고 박종규, 이낙선 등 경기단체 회장은 신분증 없이 대사관이 특석표를 사서 안내하는 바람에 자리가 좀 떨어졌다. 이에 박종규 회장이 화가 난 모양인지 IOC, KOC 놈들 운운하는 욕설이 들렸다. 그래서 필자가 “가서 이리 오도록 할까요”라고 하니 장 위원이 “우리도 통제 받는데 놓아두시오” 하고 경기가 끝난 후 거기까지 올라가서 말없이 악수만 하고 떠났다. 그 당시 박종규는 안하무인이었다. 김택수 회장은 자기 아들한테나 앉아서 악수하지 아무한테나 그럴 수 있느냐고 나중에 화를 내기도 했다.
▲ 1994년 제31회 백상체육대상 시상식. |
장기영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문화인, 경제인으로 한국이 어려울 때 여러가지 역할을 했다. 장기영은 갔지만 그가 시작해놓은 일은 여전히 역사로 굳건히 남아있다. 장기영은 1964년 정일권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되어 3년 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을 썼다.
금리 현실화와 유리창 행정,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에 기틀을 잡았다. 1966년 필자가 UN 대표부에 근무할 때 며칠 뉴욕을 방문해 경제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도 외환 환율 걱정을 하며 수시로 서울에 연락하는 등 아주 바빴다.
그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과 1965년 방미, 그리고 66년 태국 등 아시아 제국 방문에도 수행,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하여 왔으며 한·일간 현안문제 타결을 위해 1969년 필자가 아직 청와대 있을 때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한·일 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도 되었다.
1971년 공화당 종로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1973년 9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기도 했다. 또 한국일보를 통한 나무심기운동으로 새빨간 산이 오늘의 푸른 산이 되는 기틀 만들기에 이바지했다. 언젠가 언급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타고 귀경하다가 동그랗게 빨간 산 위에 서 있는 국기원을 보고 나무가 없다하자 한국일보는 5000그루를 심어주기도 했다. 지금 푸르른 국기원에는 장기영의 도움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10만 어린이 부모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분단의 서러움과 이산가족문제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 측 공동위원장 대리로 취임, 남북 대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도 앞장섰다.
장기영의 시절에는 한 사람이 한 두 가지 일만 하면 안 될 때였다. 장기영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경제인, 정치가, 문화인, 체육인 그리고 언론인 어느 쪽으로 봐도 그는 한국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인 거인이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