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28일 민경식 특별검사가 스폰서 검사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흥미로운 것은 태광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재계 일각에 ‘내부고발 경계령’이 발효됐다는 점이다. 재계 40위권의 알짜기업 태광을 졸지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일종의 내부고발에서 기인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부고발이란 조직 내부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구성원이 조직의 비리나 불법행위·부당행위 등을 대외적으로 폭로하는 행위를 말한다. 고발 대상의 비리를 가장 잘 아는 측근이나 그 조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인물에 의해 자행되는 내부고발은 언제 어떤 부분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까발려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기업 입장에선 시한폭탄이자 영원한 아킬레스건일 수밖에 없다.
이번 태광그룹의 편법 상속·증여 및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일종의 내부고발 때문이었다. 2002년부터 3년간 태광그룹 구조조정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윤배 서울 인베스트 대표가 해고된 태광그룹 핵심 인사들로부터 그룹의 비자금 축적과 세습, 로비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들을 수집해 제출한 것이었다. 자료수집 과정에 대해 박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호진 회장이 취임하면서 회사를 사유화하는 것에 반발한 계열사 사장들을 해고하거나 한직으로 쫓아냈다. 이 회장이 사람을 함부로 해고하면서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아 비리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많이 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박 씨가 이미 문제의 자료들을 1년 9개월 전부터 소리없이 조사·취합해왔다는 사실이다.
내부고발로 인해 기업이 된서리를 맞은 사례는 이번 태광그룹이 처음이 아니다. 그간 굴지의 대기업들은 물론이고 공기업과 중소기업의 부정과 비리들도 내부고발자의 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일부 기업들은 뿌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큰 타격을 받아야 했다. 특히 조직내 기밀사항을 알고 있고, 속사정에 밝은 임원급 인사들에 의한 폭로일수록 기업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입어야 했다. 따라서 일부 기업은 내부고발 노이로제에 걸렸다는 말도 들린다. 실제로 상당수 기업 측에서는 전·현직 임원의 입단속은 물론 동향과 의중을 파악하고 수시로 떠보기까지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내부고발자의 폭로에서 비롯되어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례는 많다. 1992년 현역 중위 신분으로 군 내부의 부정투표를 고발했던 이지문 씨가 대표적이다. 상명하복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군에서 개인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행해졌던 그의 양심선언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1998년 열차 보수품 유용과 하자보수의 문제점 등으로 열차 탈선사고 위험을 고발한 철도청 검수원들. 2000년 인천국제공항 터미널 부실시공을 폭로한 정태원 감리원. 2000년 용산 주둔 주한미군의 포름알데히드 한강 무단 방류를 환경단체에 제보한 주한미군 군무원. 2003년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가 에이즈와 간염·말라리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을 유통한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린 적십자사 직원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의 낙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사업가와의 골프여행과 명품쇼핑이 드러난 것도 내부고발자의 폭로로 인한 것이었다. 경찰수장 자리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조현오 경찰청장의 좌초 위기까지 이끌어냈던 경찰내부 강연 동영상 유출 역시 내부인사의 소행이라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최근 몇 년간 발생한 내부고발 사건과 관련해서 국민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각인된 인물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그룹을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다. 김 변호사의 폭로는 삼성이라는 조직에 몸담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기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내부고발은 아니다. 하지만 김 변호사가 삼성의 핵심부서에서 근무하며 그룹 내 사정을 꿰뚫고 있던 인물인 데다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근무 당시 입수한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폭로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폭발력은 대단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 비자금 사건을 비롯해 그룹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부정과 비리 의혹들을 폭로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한때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했던 김 변호사로 인해 삼성은 만신창이가 됐다.
하지만 정과 의리가 중요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내부고발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제보내용 자체의 충격성에도 관심을 갖긴 하지만 한때 같은 배를 탔던 인물이나 기업에 대해 공격하는 이들의 인격과 도덕성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탓이다. 김 변호사도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칭찬과 함께 ‘배신자의 찌질한 난동’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김 변호사가 유독 많은 비난을 받았던 데에는 삼성의 비자금 및 로비 의혹에 대한 폭로를 넘어 ‘로열패밀리’ 일가의 일상과 소소한 사생활까지 들춰냈다는 점도 작용했다.
▲ 2007년 삼성의 비자금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용철 전 삼성법무팀장. |
내부고발은 비단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4대 국새 제작단장이었던 민홍규 씨의 횡령 및 로비, 경력사칭 의혹도 당시 국새제작과정에 참여했던 최측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또 검사들의 고질적인 접대·로비실상에 대해 신랄하게 까발린 건설업자 정용재 씨의 폭로도 마찬가지였다. 20여 년간 검사들을 상대로 향응과 접대를 해왔다는 김 사장의 폭로는 결국 스폰서 검사 특검까지 끌어내며 검찰조직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내부고발 문제의 핵심은 이들의 폭로가 공익과 국익에 관한 것인지의 여부다. 즉 폭로의 순수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근 내부고발자들에게서는 공익성과 순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조직에서 아무 문제없이 생활하는 인물이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 자신의 안위와 보직을 내팽개치고 급작스런 폭탄발언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으로, 실제 내부고발자에 의한 상당수의 폭로가 개인감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조직에 대한 배신자인가,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수호를 위한 파수꾼인가. 내부고발자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