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남시는 3222억 원을 들여 지은 신청사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
“황당하죠.”
이제 막 성남시청 유니폼을 받아든 선수 A는 충격적인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성남시청 소속 직장운동부 선수들 대부분이 퇴출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속한 종목 역시 폐지 대상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A는 이미 내로라하는 대학들의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성남시청을 선택했다. 수시 전형도 모두 끝난 상태라 대학 진학은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A의 감독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쪽에 성남시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미 늦은 건 알지만 혹시 지원 가능한 대학이 남아있는지 알아보라고 권유했다. 함께 훈련하고 있던 선수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A뿐만 아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성남시청에 들어왔던 10명 이상의 선수들이 갈 곳을 잃어버렸다. 선수라곤 하지만 아직 미성년자다. 갑자기 실업자가 돼버린 이들을 두고 성남시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
직장운동부 폐지 논의는 9월 말부터 시작됐다. 성남시 체육청소년과 관계자는 “5400억 원에 달하는 판교특별회계 전입금을 단기간에 갚기 어려워 지급유예한 상태다. 긴축 경영을 하는 시 입장에서 83억 원에 달하는 직장운동부 예산이 부담됐던 게 사실이다. 결국 올해 직장운동부에 23억 6000만 원의 예산이 편성됐고, 그 결과 12종목 폐지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부자도시로 불리던 성남시가 재정난으로 허덕이게 된 건 3222억 원을 들여 지은 호화청사 때문이다. 성남시는 지난해 11월 분당구 여수동에 지하 2층, 지상 9층, 연면적 7만 5611㎡규모의 새 청사를 지었다. ‘낭비 경영’이란 비난이 일자 지난 6월, 뒤늦게 청사를 민간에 매각한다고 밝혔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다. 성남시 관계자 역시 매각 건과 관련해서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운동부 감독, 코치는 물론 소속 직원들조차 성남시 재정악화로 인한 여파가 12종목 폐지로 번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다. 성남시는 그동안 직장운동부에 들어가는 예산을 매년 10억 원가량 늘려왔다. 지난해 9월 16일엔 종목별 단원의 정수를 126명에서 130명으로, 직장운동부인사위원회 구성인원을 7인에서 9인으로 늘리는 자치법규안을 공고했고, 올해 1월 20일엔 수영, 복싱, 탁구부 코치 모집공고를 내 3명을 임용했다. 코치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임용된 지 6개월도 안된 상황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 황당하다. 시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코치 모집 공고를 내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제 와서 종목 자체를 폐지한다니 막막하기만 하다.”
성남시가 긴축 경영의 첫 단추를 운동부 감독, 선수 퇴출로 끼웠다는 점도 의문스럽다. 비슷한 시기에 재정난을 호소한 강남구의 경우 89개의 민간위탁업무 중 구청 직원이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위탁 업무 62개를 폐지·축소해 총 85억 원의 예산을 줄이는 방침을 내놨다. 광주시도 재정난 해소를 위해 지난달 27일 폐막한 세계김치문화축제 예산을 당초 21억에서 16억 원으로 줄인 바 있다. 성남시문화복지위원회 정용한 의원(한나라당)은 “성남시도 민간위탁업무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하다. 또한 2009년엔 행사·축제 경비로 무려 135억여 원이 집행됐다. 민간위탁업무와 행사·축제비를 축소하는 등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텐데 성남시의 얼굴이 되는 운동부 감독, 선수들을 퇴출시킨다는 건 앞뒤가 바뀐 게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직장운동부 소속 감독, 선수들은 성남시와 1년 단위로 연봉제 계약을 맺는다. 연봉은 3000만~5000만 원 수준. 성남시청 소속 B 종목 관계자는 “일부에서 성남시청 운동부 연봉이 6000만 원에 달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평균 3000만~3500만 원이다. 5000만 원 받는 선수는 손을 꼽을 정도다. 실업팀에서의 선수생활은 길어야 5년이다. 이후 진로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많은 연봉이라 볼 수 없다”고 성토했다.
운동부 각 종목 감독, 선수들이 퇴출 위기에 몰린 반면 성남시청 직원들은 긴축 경영의 여파를 전혀 받고 있지 않았다. 성남시 관계자는 ‘시가 재정난을 겪을 때 직원 해임이 이례적으로 이뤄져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직원 인건비 절감이나 해임에 관한 사항은 정부에서 전체적으로 하기 때문에 시에서 손을 댈 수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럼 직장운동부 감독, 선수들은 직원이 아닌가. 계약직이기 때문에 인건비 절감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해임을 결정한 거냐’는 질문에 대해선 “아직 의회에서 예산안 결정이 내려지기까진 직장운동부 폐지가 확정된 게 아니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에 빛나는 안현수, 2009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김준태, 전국체전 은메달을 획득한 씨름 유망주 박한샘 등 한국 간판선수들도 성남시 긴축 경영의 칼날을 벗어나지 못했다. 육상, 하키, 그리고 2009년 베이징올림픽 플뢰레 은메달을 차지한 남현희가 소속된 펜싱 종목만 유지된다. 빙상, 태권도, 레슬링, 탁구 등은 비인기 종목이지만 세계대회에서 꾸준히 메달을 획득해 온 효자 종목이었다. 지자체가 아니면 이들을 지원해주는 기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성남시의 퇴출 결정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게다가 성남시를 시작으로 수원시와 용인시도 운동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일부 종목을 폐지한다는 입장을 밝혀 지자체 소속 선수들은 올해 더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