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철 내각수반이 국회사절단의 미의회 시찰에서 머피 상공위원장과 만났다. |
김현철은 1901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정치인, 독립운동가, 관료였다. 특히 경제전문가로 유명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Lynchburg) 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한국인의 미국 체류는 무척 힘들 때였는데 그는 체류문제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그는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53년에 기획처 차장, 1955년에 농림부 차관과 재무부 장관, 1956년에 부흥부 장관, 1957년에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가 퇴임했다. 부흥부 장관 시절에는 송인상 재무장관과 함께 이승만 정부의 엘리트 경제장관으로 각광을 받았다. 4·19, 5·16이 일어났을 때는 쉬고 있는 상태로 4·19를 전후해서는 김현철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자유당 말기 각료 중에서는 엘리트 장관으로 송인상 등이 <타임(Time)>에 보도됐다.
1962년에 송요찬 내각수반이 경제기획원장 겸직을 해제하고 그 뒤를 이어 김현철이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어 개인적으로 처음으로 만났다. 참고로 송요찬내각이 4대 의혹사건으로 혁명주체와 충돌하여 사퇴했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내각행정의 경험을 쌓는다는 이유로 한 달 이상 내각수반을 겸직하였다. 오전에는 최고회의 의장실에서 오후에는 내각수반실에서 집무했다. 이때 박종규 경호대장이 김종필 정보부장에게 일어나는 사항을 수시로 보고했다. 이어 김현철이 내각수반에 취임하고 현역장교인 필자는 사임을 하려고 했는데 유임을 명받고 의전비서관으로 이전처럼 근무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민간인 내각수반이 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실에 근무하는 김상인 중령으로부터 들리더니 경제기획원장 김현철이 내각수반으로 발령이 나고 민간인 비서실이 몰려왔다. 그런데 군사정권이라 현역장교가 필요했는지 최고회의에서 필자에 대한 유임 명령이 내려왔고 김현철 내각수반도 필자를 간절히 요청했다. 이렇게 김현철 내각수반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비서실에는 그전과 달리 재무부 시절의 관료들이 몰려왔다. 군사혁명시대라 모든 것이 규정을 따졌고 긴축운영이라 봉급(2급갑 이사관) 이외는 수당이건 판공비건 일체 없었고 수반 판공비는 재무부 총무과장 출신이 공관을 중심으로 함께 처리했다. 수석비서관급 지프차(Jeep)에 하루 3갤런(Gallon)씩 휘발유가 지급되는데, 2갤런은 공관용으로 떼고 하루 1갤런씩이 배정됐다. 매일 1갤런씩 지급하기가 어려워 6일치 6갤런을 1주일에 한 번씩 받는 식이었다. 당연히 기름이 모자라곤 해서 필자는 동기생인 이근규 중령이 포천에서 전차 대대장으로 있어 가끔 5갤런짜리 드럼통으로 몇 개를 얻어오곤했다. 지금 같아서는 불가한 일이다. 그런데 뻔뻔스럽게 다른 비서들이 좀 나누어 달라고 했다.
▲ 김현철 내각수반이 ‘신사모’를 쓰고 제주도를 시찰했다. |
군사정부지만 민정이양으로 준비가 돼가고 있었고 그 과정이 어수선했을 때다. 김현철은 미국 출신이고 이미 이승만 박사 밑에서 부흥부 장관, 재무부 장관으로 명성을 날렸고, 원조로 지탱하는 한국의 대미경제관계를 풀려고 했으니 군사정부의 얼굴로서 적격이었던 것 같다. 그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신이 있고 흔들리지 않고 꼿꼿했다. 정부 내 관료조직과도 낯설지 않았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예우를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민간인이지만 혁명주체 군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점점 힘을 잡아나갔다.
제일 중용한 것은 미국대사관(Berger 대사)과 경제협조처(USOM Killen 처장)와 협의하여 경제원조, 군사원조의 틀과 내용을 조정하는 것이었고 경제기획원장으로 유창순이 부임해 왔다. 또 이때는 1차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되어 울산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다.
김현철 내각수반은 어찌나 깐깐한지 최고회의 등에서 청탁이 와도 경우에 안 맞으면 듣지 않았다. 현역들이라고 해야 30대이고, 장군이라야 40대인데 김현철 수반같이 60이 넘고 이미 이승만 정권 때 기획, 부흥, 재무를 두루 거치고 군사정부에서도 경제기획원장을 거쳤으니 그 축적된 경륜과 힘은 대단했다. 그래도 군사정부이며 최고회의가 실권을 가지고 있고 중앙정보부의 파워가 막강해 상당히 조심하기는 했다.
1963년 들어서는 이미 민정이양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고 최고회의는 공화당 창당사전조직설과 4대의혹 사건 등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드디어 김종필 창당준비 위원장이 김홍래, 김상인 보좌관 둘만 대동하고 외유의 길을 떠났고 한 달 정도 김용순이 정보부장을 맡았다가 김재춘이 부임했고 정국이 아주 어수선했다.
1963년 1월 2일에는 송요찬 전 수반이 동아일보 2면 전면에 군은 군정을 끝내고 민정이양을 하고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군에 복귀하라는 권고문을 냈다. 김현철 내각수반이 필자를 불렀다. “송요찬 수반 잘 아시지요? 좀 만나서 그러지 말라 그러세요. 젊은 사람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라고 했다. 어쨌든 일단 신당동 자택에 가서 기분 상하지 않게 권고를 했다. 곧 김형욱이 정보부장으로 김재춘의 뒤를 이어 부임했고 8월 초에는 송요찬이 구속되었다.
그 후 얼마 안가서 필자는 독일 정부의 초청으로 독일을 시찰하고 이어서 영국 공보원 초청으로 영국의회제도 등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미국의 아시아재단에서 미국학계를 시찰토록 초청이 이어져 <코리안 리퍼블릭>(Korean Republic)지의 김봉기 부사장, 공보부의 김현두 서기관과 같이 서울을 출발했고 이때가 김종필의 외유와 맞물렸는데 홍콩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마주쳤다. 김종필은 김홍재, 김상인과 있었다.
▲ 김현철 내각수반(맨 왼쪽)이 뉴욕에서 롱아일랜드대 혹시 총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
1963년 3월, 그 당시로는 드물게 세계일주를 마치고 김포공항을 도착했는데 가족이나 수반실 직원들도 경직된 표정이라 이상하게 느꼈다. 인사를 끝내고 나니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하고 검은 지프차에 태워 중앙정보부 서울분실로 갔다. 무엇인지 몰라 궁금해 하고 있는데 송요찬 수반이 동아일보 2면에 게재한, 즉 ‘군으로 복귀하라’는 1페이지의 기사에 관련된 혐의였다. 김현철 내각수반이 국무회의에 나와서 필자가 귀국했느냐 물어보니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고 있다하니 대로했다고 한다. 김재춘 정보부장은 전화를 피하고 박원선 차장이 물어 볼 것이 있어 연행했다고 연막을 치고 하루 조사 받고 김현철 수반의 개입으로 무혐의로 풀려났다. 조사과정에서 한때는 동빙고동에 넘긴다는 협박도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삼청동의 총리공관에 가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사임하겠습니다”고 했더니 “좀 알아 볼 터이니 그냥 정상근무 해라.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젊은 인재를 망친다”고 해 그대로 복귀해 근무했다. 그 당시는 김재춘 정보부장이나 그 후 김형욱 부장까지 김 수반을 만나러 자주 왔다.
주미대사관 근무 때 군사혁명정부의 대변을 하다 보니 경계를 많이 받았다. 11월 23일 오찬을 하고 대사관에 돌아오니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을 받았다고 여비서가 보고했다. 곧 케네디 대통령 사망이 보도되고 조문 정국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원수가 미국을 방문했다. 서울에서는 김현철 내각수반이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가 내리고,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간다는 연락이 왔다. 김정열 미국 대사가 서울에 전화를 걸어 박 당선자에게 조문 외교에 대해 역설을 했던 게 박 당선자의 마음을 바꾼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박 당선자는 국회의원 선거로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1964년 가을에 김현철이 주미대사로 부임했다. UN총회 때는 뉴욕으로 와서 활동을 후원했고 필자가 가끔 국무성이나 상하위원을 접촉하러 워싱턴을 방문할 때 꼭 김현철 대사를 만나 내용도 설명하고 여비 절약차 대사관저(2565 Mcgill Terrace)에서 묵기도 했었다.
1967년에 김현철은 대사직을 떠나 귀국, 69년 5.16 장학회 이사장, 73~79년 헌법위원회위원, 1980년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81년 전두환 정권 때 다시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고 89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김현철은 아무리 찔러도 움직임이 없는 소신 있는 신사였다. 어려울 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승만 정권 때는 재무장관으로 한국의 부흥을 도왔다. 무엇보다 그의 공은 군사혁명정부의 마지막 유일한 민간수반(총리)으로서 제3공화국으로 민정이양 되는 과정을 지켜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 IOC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