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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지원은 은퇴 후 농구 해설위원과 유소년 농구교실을 이끌며 제2의 농구 인생을 펼치고 있다. 사진=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리터칭=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경기도 분당 정자동에 위치한 우지원 스포츠아카데미 사무실. 그의 방문에는 ‘대표’도 ‘사장’도 아닌 ‘단장’이란 타이틀이 걸려 있다. 아마도 농구를 하는 동안 그나마 가장 익숙한 직함이 단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날 창원에서 농구 해설을 마치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는 우지원은 지방을 다닐 때는 주로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기엔 너무 먼 거리들이에요. 처음엔 혼자 다니는 게 낯설고 익숙지 않아서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하게 대중교통 이용하면서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사인도 해드리고 잠도 자고 책도 읽으면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해설가로는 ‘완전 초보’라 여전히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를 잡는 게 어색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친정팀 모비스 경기를 중계할 때는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해설위원보다는 여전히 선수가 돼 팀플레이에 녹아 들어가는 습관으로 인해 감탄사와 탄식으로 1쿼터를 그냥 흘려보낸 적도 있었다.
“시선 처리가 불안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요. 카메라 불이 들어오면 카메라나 캐스터와 시선을 마주쳐야 하는데 어느 순간 제 눈은 공을 따라가고 있거든요. 아직도 제가 선수인 줄 착각할 때가 종종 있는 거죠. 경기 전이나 후에 감독님이나 선수들을 만나는 부분도 어색해요. ‘지원아’ ‘형’이란 소리가 편한데 ‘우 위원’하는 말이 들리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자꾸 부딪히면서 겪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죠 뭐.”
전력분석관보다 농구교실
지난 시즌 울산 모비스가 전주 KCC를 꺾고 통합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때 우지원은 은퇴를 발표해야 했다. 이미 2월 정도에 구단으로부터 은퇴 제의를 받았고 서로 진지하게 고민하자는 얘기만 한 상태에서 결국엔 구단의 뜻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단에서 제시한 보직이 전력분석원이었다. 이로 인해 농구인들 사이에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코트 위의 황태자’로 농구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최고 인기 스타가 코치도 아닌 전력분석원으로 일을 한다는 데 대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전 유재학 감독님 말씀처럼 밑바닥부터 생활해 보고 싶었어요. 전력분석 일 자체도 앞으로 지도자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실제로 5월부터 두 달가량 대학팀을 쫓아다니며 비디오도 찍고 보고서도 쓰면서 생소한 경험을 했었죠. 주위에서 두 가지 얘기를 하더라고요. 대부분의 지인들은 ‘전력분석원을 왜 하느냐’ 하는 것과 또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일을 배우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다’라고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옷이 저한테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더욱이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유소년 농구교실이 제가 자리를 비우면서 제대로 진행되질 않아 난관에 봉착했어요. 결국 두 가지 길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농구교실이었습니다.”
우지원은 이름만 빌려주고 다른 지도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농구교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아이들을 직접 다 가르칠 수는 없지만 그룹별로 돌아가면서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고 농구에 대한 재미를 키워주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유소년들이 되길 희망했고 실제로 지금 그런 일들을 벌여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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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농구 개막전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잠시 화제를 2003년으로 돌려봤다. 2003~04시즌 우지원은 선수생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는 그는 시즌 전 경기 출장에다 평균 득점 20점을 올리며 팀의 주축 선수로 인정받는 등 농구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04년 울산 모비스에 유재학 감독이 부임하면서 우지원은 극과 극의 인생을 내달렸다. 유 감독 체제 하에서 우지원은 베스트 멤버가 아닌 식스맨으로 전락했고 출전 시간도 40분에서 25분, 15분, 10분 등으로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말들이 정말 많았어요. 어떤 기자 분은 아예 대놓고 ‘유재학 감독한테 밉보인 행동을 했었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선수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었죠. 상황이 그렇다보니 제 가족들은 오죽했겠어요? ‘감독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거냐, 말 못할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등 난리였습니다. 정말 전 감독님이랑 단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었어요. 밖에서 추측하는 것처럼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요. 단지 감독님 스타일이랑 제 농구가 맞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어요. 당시 다른 팀에서 절 필요로 한다는 얘기도 들리고 해서 감독님께 처음으로 면담 요청해서 트레이드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우지원이 유재학 감독한테 했던 트레이드 요청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었다. 행여 유 감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었다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던 마음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자신이 뛸 수 있는 팀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그 팀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 감독은 우지원의 트레이드 요청을 듣고 처음으로 우지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꼭 필요한 선수이긴 하지만 40분 내내 출전시킬 수가 없다고요. 후배들을 위해 조금씩 출전 시간을 양보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를 원하셨다면서 다른 데 갈 생각하지 말고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제 위치가 파악됐어요. 제가 있어야 할 자리와 앞으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감독님의 상황이 이해가 됐기 때문에 트레이드 요청은 그냥 없던 일이 되고 말았죠.”
화려한 은퇴는 꿈
농구대잔치 세대의 부흥을 이끌었던 연세대 출신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은 선수 시절 은퇴 후의 모습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선수 생활보다 은퇴 후의 삶이 훨씬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라한 마무리보다는 화려한 시절에 박수 받으면서 무대를 떠나자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냉정했다. ‘산소같은 남자’ ‘황태자’ ‘람보슈터’로 인기몰이를 하던 세 사람은 1~2년이라도 더 현역 시절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결국 코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저 또한 마흔 살까진 선수 생활을 할 계획이었어요. 농구를 위해 술, 담배도 하지 않았고 후배들보다 더 일찍 훈련장 나와서 더 늦게까지 연습하며 몸을 만들었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제가 원하는 부분과는 달리 돌아가더라고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이 모두 은퇴를 하게 됐어요. 화려한 은퇴를 못해서 아쉬운 것보다는 어떤 회한이 남은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어요. 그러나 이젠 각자의 길을 걷고 있잖아요. 상민이는 유학을 떠났고 경은이 형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고, 전 해설과 농구교실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모두 다시 코트에서 만날 거라고 믿어요. 서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고요.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은 코트이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우지원은 농구장 대관 문제로 농구교실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농구교실이 안정화에 접어들면 자신의 이름을 딴 전용 체육관을 지어 많은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 그 문제로 시간 있을 때마다 아내와 함께 계산기를 두드리며 지출 규모를 뽑아보는데 억대 연봉자에서 졸지에 무일푼 신세가 되다보니 이전에 좀 더 돈을 악착같이 모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며 웃음을 터트린다.
riveroflym@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