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온 국가원수들의 복잡한 속내와 각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생생한 현장의 기록으로 담겨져 있다. 누구나 진짜 내막을 알고 싶어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알기 어려웠던 대한민국 현대정치의 불편한 진실들을 하 전 의원의 회고록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를 통해 들여다봤다.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를 시작함에 있어 가장 역점을 뒀던 과제 중 하나는 전 정권이 심어둔 암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저자는 회고록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전임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정권을 잡은 최규하 전 대통령은 그런 의미에서 ‘두드린 돌다리도 건드리지 않은 대통령’으로 표현된다. 저자는 12·12 사태의 시발점이 최규하 전 대통령의 소극적인 태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책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누구보다 먼저 10·26 사건의 진상을 보고받고 파악했다. 그는 즉시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현장 바로 옆에 있었던 정승화에 대한 조사를 합수부에 지시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12·12와 5·18 참상이 과연 가능했을까.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수사본부장은 최 전 대통령에게 정승화를 합동수사본부로 연행해 조사하겠다고 보고했지만 최 전 대통령은 수사본부장의 결재 요청을 미루고 국방부 장관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가족과 함께 한남동에 있는 단국대학교 체육관에 숨어 있어서 최 전 대통령과는 연락도 되질 않았다.
결국 뒤늦게 나타난 국방부 장관의 건의 형식으로 재가를 했지만 때는 늦어 이미 한남동에 있는 참모총장 공관에서는 정승화를 연행하려는 수사팀과 이를 거부하는 총장공관의 무장병력 사이에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이 충돌이 바로 12·12 사태의 시발이라는 것이다.
▲ 1980년 8월 18일 청와대에 입주한 지 163일 만에 하야한 최규하 대통령 내외가 청와대를 떠나 서교동 사저로 돌아오고 있다. 사진출처=80년 보도사진연감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등을 돌리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돼 있다. 저자는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전두환 대통령을 참석하지 못하게 한 일화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노력을 다해 88년 서울올림픽을 성사시킨 것인데 노태우는 자신이 항상 전두환의 엄호 속에 양지가 아닌 그늘진 음지의 연속이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속 좁은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퇴임 이후 곧바로 ‘5공 청문회’의 표적이 된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귀양 갔을 당시의 이야기도 전한다. 저자는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한 뒤 백담사로 들어간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당시 전직 대통령 내외의 참담한 삶을 전하며 “1988년 12월 아내와 함께 전 전 대통령이 유배되어 있는 백담사를 방문했다. 눈 내린 강원도 산사는 유난히 추웠다. 전직 대통령 내외는 승복 차림을 하고는 비닐로 바람막이를 하고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를 일컫는 이른바 ‘3김 시대’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도 나름의 기억을 털어 놓았다. 저자는 YS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DJ가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영국으로 떠난 것에 대해 유학이 아닌 ‘도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YS는 배짱이 두둑하고 ‘이거다’ 싶으면 곧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YS가 아니고선,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며 “DJ가 19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하자마자 서둘러 영국 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YS가 휘두른 개혁 칼날을 맞았을 것이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당시 YS의 개혁물결에 두 전직 대통령이 사법처리됐고, 대선 때 애를 먹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혼이 났다. 저자는 “DJ는 이런 가능성을 미리 꿰뚫고 있었다. 정치 현장을 떠남으로써 정권의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정치 라이벌에게 홀가분함을 주는 뜻도 있었던 것이다”며 “DJ는 정치적 후각이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 1997년 광주대학 법인창립 27주년 기념식에서 회동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재. |
저자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DJ는 중앙정보부에 의한 납치사건과 5·18 이후 호남권에서 일약 국제적 인물로 등장했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 세 차례의 도전에서 번번이 실패했다”며 “지역적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반공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보수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JP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JP를 어떻게 끌어 들이냐는 방법론이었다. 저자는 “JP는 마지막 순간까지 연대에 대한 확언을 하지 않고 버텼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1997년 11월 2일 밤 DJ는 JP의 신당동 집을 찾았고, JP는 합의문에 유리한 내용을 얻어 냈다. 소위 ‘DJP 연대’의 속내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과 관련해서는 YS의 발언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YS는 노 전 대통령의 검찰조사를 빗대 ‘전두환·노태우에 이어 얼마나 불행한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냐. 세계에 부끄럽다’고 말했지만 YS도 소위 ‘안풍’ 사건이 터진 2004년 법원에 증인으로 채택됐고, 대선자금 등이 안기부 예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의혹에 대해 법원의 요구를 받고도 법정출석을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자서전에는 이명박 대통령 일가에 대한 비화도 언급돼 있다. 저자는 “이 대통령이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모든 가난을 이겨내고 일어선, 그야말로 자수성가형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그가 일군 일가는 한마디로 한국의 명문 귀족이다”며 “이 대통령은 자녀들을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까지 불사한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정재계의 복잡한 혼맥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18대 총선 때 상왕정치, 형님 공천이란 신조어를 만든 이상득 의원의 장녀가 LG가로 시집가지 않았나. 이 의원은 오명 전 과학기술부장관과도 사돈지간이다”며 “원래 귀족은 돈과 지식을 독차지하는 집단이다”고 일침을 가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