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형 박사(오른쪽)와 이태영 여사 부부가 73년 8월 14일 일본에서 납치됐다 생환한 김대중 당시 신민당 전 대선후보를 격려하기 위해 동교동 자택으로 찾아왔다. 연합뉴스 |
정일형은 황해도 안익군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정대철(현 민주당 상임고문)은 4대 독자가 된다. 정일형은 평양의 광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입학, 1927년에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는데 그 당시 최고 멋쟁이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정일형은 1935년 미국의 드류(Drew)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참 후인 1960년에는 법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교회활동, 특히 외금강 수양회 강사로 나가기도 했는데 1936년 외가쪽 인척인 이윤영의 주례로 이태영과 결혼했다.
1937년 연희전문 교수로 초빙된 후 숭실전문, 감리교 중앙신학교 등에서 교수 및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일본 신사참배 반대 등 배일사상의 선도자라는 죄목으로 1940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1945년 석방되고 8·15광복을 맞이했다.
8·15 광복은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자기 뜻을 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던 한국인에게는 독립의 기쁨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자기 능력껏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지하에 있던 일꾼들이 다 나오게 되면서 정일형, 이태영 여사한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정일형은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0월에 미 군정청 설치 후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역임했다. 이때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많지 않았을 때라 그랬는지 연희전문 출신들이 군정청이나 대한민국정부수립 초기에 미국유학 출신 고관들과 일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결국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대 국회까지 8선의 의정생활을 했다.
정일형은 6·25전쟁 발발 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사를 창립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조병옥, 관상훈, 장면 등과 대성빌딩에 모여 민주당 창당준비회의를 거쳐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했고 국회에서도 외무위원장을 지냈고 당내에서도 섭외부장, 외교부장 등 외교문제를 도맡아 처리했다. 유엔한국협회 회장을 지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왼쪽)과 정일형 외무장관(가운데). |
허정 내각의 과도정부가 들어서자 송요찬 참모총장은 사임하고 최영희 장군이 참모총장, 최경록 소장이 중장 진급과 함께 참모차장이 됐고, 3개월이 흐르면서 장면 정부가 들어서자 최경록 참모차장이 참모총장으로 발령났다. 물론 이는 정일형의 강력한 추천에 의한 것이고 군단장, 군사령관을 거치지 않고 참모차장을 3개월, 일종의 견습으로 삼아 바로 총장이 된 것이다.
최경록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자 필자도 중령으로 진급하고 육군참모총장실 수석 전속부관으로 복귀했다. 이승만 박사 때의 경무대와 달리 청와대라고 개칭된 관저에 윤보선 대통령이 들어갔지만 내각책임제 정부로 개헌이 되어 장면 총리 내각이 국정을 책임졌다. 국방장관에 임명된 현석호, 권중돈 등은 군을 통솔해야 하나 육군에 있는 우리는 별로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헌법상 윤보선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지만 민주당 정부는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 기반도 없었다. 최경록 총장은 주로 장충동 정일형 외무장관 공관에 자주 들렀고 필자도 정일형 외무장관, 이태영 여사를 자주 만나게 됐다. 정일형 박사는 부드러우면서도 무게가 있고 덕으로 사람을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일형 박사보다는 주로 이태영 여사가 말을 많이 했다.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두 분이 영어를 하는 분이었다.
민주당 정부에는 장면 총리 빼고는 국제통이 정일형 외무장관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그간 민주투쟁을 하던 재야투사들뿐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4·19 후의 혼탁하고 궁핍한 한국 현실에서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그리고 유엔의 지지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국무원 사무국 건물 2층의 장면 총리실에 CIC 정보보고를 가지고 가면 김흥한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때의 경무대 같은 위엄이 없었다. 외무장관 공관에는 정대철, 진숙, 선숙, 미숙 등 자녀들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정대철은 거기서 처음 만났다. 당시는 명랑한 경기고 3학년 학생이었다. 그 공관은 5·16 후에 수리해서, 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썼다.
▲ 정일형·이태영 부부 가족 사진. |
정일형 장관이 미8군이나 테이로프(Taylov) 미 참모총장 등에게도 신경을 써 가끔 공관에서 위로만찬 등이 열리면 최경록 참모총장과 필자가 참석했다. 영어를 못해서는 아니지만 군 관계 전문가인 필자가 통역을 거들었다. 그때 이태영 여사가 내가 하는 영어를 듣고 “언젠가 국가를 위해 그 영어를 써 먹어야 하는데”라며 한숨과 함께 극찬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서울올림픽, 대미외교, 북방외교 등 외교문제에 앞장설 때 이 여사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이태영 여사는 그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흥한 실장이 외유 중일 때 최경록 총장이 미 국방성 팔머(Palmer) 대장에게 내정간섭하지 말라고 한 것이 문제되어 최경록 총장은 경질되고 장면 총리의 의중대로 장도영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이때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던 박정희 장군은 곧 5·16군사혁명을 일으켜 민주당 정부를 소멸시켰다. 이때 정일형은 이미 장면의 직계와 관계가 원만치 못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최경록 경질이 이루어졌고 맥그루더 미8군 사령관도 그 인사에 동의했다고 한다. 최경록은 미8군의 도움으로 체포 직전에 미국으로 피신했다. 이한림, 강영훈, 최석, 김응수 장군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정 박사는 5·16으로 장면총리가 사임하고 모든 정치활동이 정지되어도 계속 야당에 소속되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했다. 1967년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고,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결혼에 중간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3·1명동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었고 국회의원직 상실과 공민권 박탈을 당했으나 1979년 10·26사태 이후 복권됐다. 1980년 광주사건 발생 후 병상에서 김대중 구출을 야당인사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으나 1982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그는 생각만 해도 묵직하고 흔들림없는 야당의 거목이었다.
평생 정일형 박사의 반려자인 이태영 여사도 대단한 여걸로 둘은 그 당시로는 드물게 안팎으로 활약한 커플이 됐다.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을 나오고 또 서울대 법대 최초의 여대생이었고, 1952년에는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보수적인 여성관 때문에 판사임용이 안 되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여성권리보호에 전력투구했다. 1956년에는 기념비적인 여성법률상담소(현 가정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신출내기 여자 변호사가 뭘해’ 하는 식의 법조계의 편견과 30년을 싸우며 가족법 개정을 위해 일했다. 군사독재 정권시절에는 야당 국회의원인 남편과 함께 민주회복 국민선언, 3·1 민주 구국선언에 참가했고, 또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변호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김대중의 결백을 주장한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처음에는 정일형 박사를 주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이태영 여사와 더 자유롭게 친교를 유지했다. 4·19 직후 민주당 정권 때 참모총장실에 근무하면서는 정일형 박사와 가깝게 지냈지만 5·16 이후 군사정부 때는 입장이 달라서 그런지 가끔 마주쳐도 대화가 별로 없었다. 대신 이태영 여사와는 더 편하게 만나곤 했다.
정일형 박사는 1978년에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격정지로 입후보를 하지 못하자 아들 정대철에게 선거구를 물려주어 당선되도록 만들었다. 정대철도 신군부시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아버지 유언대로 민주정치 구현을 위해 줄곧 야당에서 정치 역정을 보냈다.
정일형, 이태영 평화상의 제정되어 매년 인권상, 평화상을 수여하고 두 분의 민주항쟁과 민권운동을 위한 공을 기리고 있다. 2008년에는 김대중 내외도 참석하고 이철승, 함세웅, 한승헌, 김상현, 김원기, 김옥선, 박지원, 손주항, 조홍규 그리고 민주당계 인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재야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집안은 정일형, 이태영 두 분의 기나긴 독립투쟁과 민주항쟁 그리고 인권운동의 유지를 받들어 오늘도 내일도 외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정일형, 이태영 부부와 아들 정대철, 그리고 손자까지도 3대에 걸쳐 지켜본 까닭에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