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마라톤 금메달을 딴 지영준이 아들 윤호를 안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영준은 6년 전 이미해 씨를 만났다. 당시 이 씨도 원주 상지여고를 졸업하고 용인시청에 육상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용인시청이 단거리 위주였고, 중장거리가 주종목이었던 이 씨는 성적이 신통치 않아 지영준도 ‘육상후배 이미해’를 알지 못했고, 이미해도 지영준을 잘 몰랐다. 선배의 소개로 만났는데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반해버렸다. 이 씨는 눈에 띌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면서 시쳇말로 똑똑했고, 이 씨는 지영준의 착한 성품에 자석이 끌리듯 끌려버렸다.
“오빠(지영준), 아니 윤호 아빠는 참 착해요. 원래 착한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서운 법이죠. 코오롱과의 갈등도 그런 것이었어요. 스스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다고 판단했죠.”
둘이 처음 만날 때 지영준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1999년 충남체고를 졸업하고 코오롱에 입단한 지영준은 마라톤 풀코스에 데뷔한 지 1년 만인 2002년 11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9분대를 기록하며 황영조-이봉주를 이을 차세대 기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2005년 부상으로 첫 시련을 맞았다. 더구나 코오롱 마라톤팀에서 내분을 겪으며 숙소를 이탈해 파문을 낳았다. 이 무렵 이미해 씨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다시 코오롱으로 돌아간 지영준은 2006년 도하 대회 마라톤에 나섰지만 2시간19분35초로 7위에 그쳤다. 그리고 군복무를 위해 경찰대에 들어갔고, 2009년 4월 대구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대를 끊어 부활을 알렸다. 경찰대 시절 마라톤의 특성상 부대 밖에서 훈련을 할 때 이미해 씨가 코치를 맡고 있는 원주 상지여고로 향했다. 이 코치의 소개로 정만화 상지여고 감독을 만났고, 그와 같이 훈련을 하면서 다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둘은 그해 6월 결혼식을 올렸다.
지영준은 2009년 10월 경찰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코오롱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 육상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한국에 금메달을 안길 가장 유력한 선수가 소속팀과의 갈등으로 무적선수가 되며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갈등은 2010년 3월 지영준이 ‘코오롱으로 복귀하지만 적(籍)만 코오롱에 둘 뿐 훈련을 자체적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일단락됐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황영조 기술위원장도 지영준이 정만화 감독이 있는 원주에서 훈련을 하도록 배려했고, 원하던 대로 훈련에만 매진한 지영준은 ‘광저우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 이미해 씨와 아들 윤호. |
정만화 감독은 원지 상지여고의 체육선생 겸 육상부 감독을 맡고 있다. 슬럼프에 빠진 지영준이 찾아오자 조건 없이 그를 도왔다. 이번 아시안게임을 대비한 훈련 때도 원주에서 지영준과 새벽 훈련을 한 후 오전에 학교수업을 하고, 다시 오후에 훈련에 나서는 등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정만화 감독은 “(지)영준이가 레이스 도중 제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해서 15㎞, 20㎞, 25㎞, 39㎞ 등 계속 따라다니며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몸 상태가 좋았던 영준이가 치고 나가려고 했지만 제가 말렸어요. 놔뒀으면 기록은 더 좋아졌을 텐데, 워낙에 순위 싸움이 중요했던 까닭에 확실하게 우승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운 겁니다. 믿고 따라준 영준이에게 고마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미해 씨는 이번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난 7월 태어난 첫 아이 윤호를 광저우로 데려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어린 아이를 비행기에 태우는 것 자체가 겁났고, 환경이 다른 곳에서 혹시라도 병이라도 들면 어떻게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영준이 강력하게 원했다. 그는 득남 후 “이제는 윤호를 위해서 뛰겠다”고 선언하며 눈빛이 달라질 정도였다. 덕분에 아시안게임을 대비한 훈련을 너무나 잘 소화했고, 최고의 몸 상태로 대회에 나가게 됐다. 그리고 현장에서 정만화 감독은 물론이고, 아내와 아들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 씨는 어린 윤호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다. 덕분에 지영준은 골인지점에서 아들 윤호와 멋진 세리머니를 보여줬다.
이미해 씨는 지난 11월 30일 상지여고 코치직을 사임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내년 세계선수권 등 이제 마라톤 선수의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는 남편의 내조에 더욱 전념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아내가 아닌 육상지도자로서 선수인 남편의 단점을 꼽아보라고 하니 “유연성이 좀 부족해요. 그래서 틈만 나면 스트레칭 등 유연성 보강 훈련을 많이 하라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라는 답이 나왔다. 이 씨는 현역 육상 지도자로서 보약이나 식사 등 지영준의 평소생활도 많이 챙기는 등 ‘제2의 코치’ 역할을 맡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지영준의 성공스토리에서 ‘윤호 엄마’는 지영준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임에는 확실하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