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이 대여투쟁 수위를 높이고 있다. 7일 밤 민주당 손학규 대표 등 의원과 당직자들이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전날 저녁부터 서명운동을 벌여온 손학규 대표는 “최고위원회의를 서울광장에서 하게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참으로 비통하다”고 운을 뗐다. 그는 “어제 저녁 저와 정동영 최고위원을 비롯해 많은 의원, 당직자들이 서울광장 천막에서 지냈다”면서 “이명박 독재를 심판하고 민주당을 성원하는 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 추운날씨를 견뎌냈다”고 말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천막 안을 숙연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국민들은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가혹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댈 것임을 확신한다”고 했고, 정동영 최고위원은 “역사후퇴, 민주주의 후퇴, 평화 후퇴를 바로잡겠다는 것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가 치러졌던 시청 앞 광장에서 다짐한다”고 했다. 이를 지켜본 당직자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고 전했다.
민주당은 14일 인천, 15일 대전, 16일 부산 등의 일정으로 권역별 대규모 정치 규탄 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당 차원의 대규모 반정부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예산 처리 과정의 불법성에 대한 법적 대응 수단도 마련하기로 했다. 헌법소원을 검토하고 있고, 폭행사태에 대해선 민·형사상 책임을 묻기로 했다.
민주당은 민간인 불법사찰과 대포폰 게이트, 천안함 문제, 4대강 문제 등 모든 현안에 대해 “국정조사를 쟁취하겠다”고 별렀다. 손 대표는 “개인적인 지지율 등락에 연연하지 않고 가열찬 투쟁을 하겠다”며 의원들을 독려했고, 이미 소속 87명의 의원들에게는 12월과 1월 두 달간 해외출국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처럼 민주당이 강경한 장외투쟁을 전개할 참인데도 당내에선 적잖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바로 1년 전 벌였던 장외투쟁과 ‘데자뷰(이미 본 듯한 느낌) 현상’을 느끼는 당직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2009년 7월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미디어 관계법이 통과된 데 반발해 집단사퇴를 결의했다. 하지만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의장이 아닌 정세균 대표에게 맡기는 바람에 ‘정치쇼’라는 비판을 샀고, 시쳇말로 김빠지는 장외투쟁이 돼버렸다. 당시 정 대표와 천정배 최문순 장세환 의원은 “미디어법이 원천무효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의원직 사퇴를 선언하고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본회의에서 처리되지 않아 현역의원 신분으로 노숙과 길거리 투쟁을 벌이다 결국 올해 1월과 5월에 국회로 돌아왔다.
당내에선 “(당시) 1년간 거리를 헤맸지만, 실제로 그만한 효과를 거뒀는지는 의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번에도 ‘의원직 총사퇴론’이 제기됐으나, “국회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의견이 많아 대국민홍보전 쪽으로 결론이 난 것도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의회를 떠난 야당은 힘이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장외투쟁의 대여전선을 넓혀갈 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의견들도 많다. 내년 초로 예상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제외하면 당장 긴급한 현안이 없다.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종교계가 지원군이지만, 그것만으로 정부, 여당과 전면전의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여론의 지지를 얻기에는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일각에선 ‘대포폰 게이트’처럼 현 정권의 비리나 정책실패를 드러내는 ‘한 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 풀에 지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손 대표 역시 겉으로 보면 전면 투쟁의 노선이 간결해 보이지만, 내막을 따지고 보면 사면초가의 처지다. 우선 연평도 사태 이후 대북정책을 놓고 정체성 문제가 불거졌던 터라 그에 대한 당내 불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다. ‘원외’라는 한계를 지닌 탓에 박 원내대표의 원내 전략에도 내놓고 개입할 수 없다. 더욱이 한나라당이 누누이 공언해온 예산안 강행처리 의지를 안일하게 판단해 국정조사 요구와 예산심의 지연전술을 함께 구사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대두되는 것도 향후 투쟁의 전선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 고위당직자는 “손 대표가 갈고닦은 보검을 꺼내들었는데 정작 자를 게 마땅치 않은 형국”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당직자는 “손 대표의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투쟁방법에 있다”면서 “현장중시의 콘셉트가 서울광장 농성이라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동정적으로 바뀔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이 당직자는 “모든 투쟁에는 퇴로를 만들어놓아야 하는데, 지금 손 대표의 행보를 보면 그것에 대한 고려도 없는 것 같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그러는 사이 손 대표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9일 발표된 <국민일보>의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손 대표는 4.3%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29.5%),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10.0%),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5.3%), 김문수 경기지사(4.6%), 오세훈 서울시장(4.4%)에 이어 6위에 그쳤다. 지난 10월 초 당 대표로 선출된 직후 실시된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10%대를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상승세가 크게 꺾인 셈이다. 손 대표는 대여투쟁에 나서면서 “지지율 등락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바로 그런 지지율 하락 때문에 당 장악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대포폰 게이트로 정국을 주도하던 국면에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로 존재감을 잃어버렸고, 이어진 안보정국 속에서 다시 한·미 FTA 재협상 문제로 뒤집어보려 했지만 예산안 강행처리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돼버린 손 대표. 차가운 한겨울에 벌이는 그의 ‘거리 정치’가 정국을 뜨겁게 달구며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을지 당 안팎의 시선들이 집중되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