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SK네트워크의 사진관 ‘스코피’, 청소사업을 운영하는 인터파크, 음악 강습을 하는 SK 뮤직홈. |
“통큰치킨 사태는 빙산의 일각이죠.” 대기업의 영세사업 진출 사례가 늘어나면서 소위 ‘동네 장사’의 씨를 말리고 있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에 대해 최근 출범한 동반성장위원회 관계자는 “이번에 불거진 롯데마트의 사례는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았다. 2006년 이전만 해도 중소기업 고유 사업 분야 180개를 지정해 해당 사업에 대한 대기업의 진출을 막아 그나마 안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빗장이 풀린 후 소규모 자본으로 할 수 있었던 사업에까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뛰어들어 골목 상권을 잠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롯데마트에서 시작한 저가형 ‘통큰치킨’ 사업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생한 논란인 셈이다.
최근 대기업들이 뛰어든 ‘구멍가게’ 사업은 무엇일까. ‘통큰치킨’ 사례를 계기로 돈 되면 뭐든지 하는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실태를 들여다봤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 강서구 일대에서 중소 청소업체를 운영해 온 업주 강 아무개 씨(54)는 최근 들어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시름이 깊어졌다고 토로한다. 온라인 쇼핑몰인 인터파크에서 청소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매출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청소사업은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어 소자본을 가지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아이템이었다. 강 씨 역시 이 점 때문에 퇴직 후 부담 없는 사업을 구상하다 청소업체를 설립하게 됐다. 강 씨는 “동네에서 자리 잡기까지 근 10년이 걸렸다”며 “그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고객을 모으는 방식으로 하루벌이를 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인터파크에서 청소사업에 뛰어들면서 영세 청소업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인터파크의 움직임에 떨고 있는 곳은 청소업체뿐만이 아니다. 인터파크 측은 현재 포장이사, 가사도우미, 해충박멸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영세사업자들의 경우 한 달에 150만 원 정도 투자해 전단지를 제작한 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겨우 고객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인터파크의 경우 방대한 양의 고객 정보와 자본력, 브랜드 인지도 등의 이점을 활용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호객행위를 할 수 있다.
영업 전략도 스케일이 다르다. 전 직원들이 가정관리와 관련한 자격증 소유자이거나 교육과정을 거친 전문가인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가 하면 수천만 원 대의 청소기계와 약품을 사용한다는 점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강 씨의 경우처럼 개인이 시작하면 자리 잡기까지 평균 10년이 걸리지만 인터파크의 경우 시작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에 지사를 확장하고 더 많은 분야의 홈 케어로 사업망을 넓히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 종로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해 온 김 아무개 씨 역시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에 “엎친 데 덮친 격이다”며 울상을 짓고 있다. 그동안 졸업 시즌은 사진관의 대목으로 꼽혀 왔지만 학교나 단체와의 거래가 끊긴 지는 오래됐다. 돌 사진과 같은 각종 가족행사를 부지런히 뛰면서 그나마 수익을 올려왔지만 최근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온오프라인 사진관이 틈새를 비집고 등장해 그나마 남은 고객들을 뺏어가고 있다. SK네트워크에서 스코피라는 브랜드명을 내세워 오프라인 사진 관련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이 회사의 세부적인 아이디어나 영업 전략은 영세사업자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다. 스코피에서는 특수 앨범제작이나 엽서, 특수 달력, 다이어리 제작 등 사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테마를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다. ‘베이비 스코피’를 개점해 아기사진 전문 스튜디오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 매장까지 생긴 데다 기존 인화 가격의 반값밖에 되지 않는 가격경쟁력을 내세우자 소비자들의 호응도 높다. 첨단설비를 통해 인화 속도도 하루를 채 기다리지 않아도 돼 동네 사진관을 찾는 손님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는 사업자들 역시 대기업의 사업 진출에 허탈한 쓴웃음을 짓고 있다. SK M&C에서는 2008년 5월부터 SK에너지에서 시작한 뮤직홈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뮤직홈 사업이란 가정 방문을 통한 1:1 방문 학습과정을 말한다. SK 본사에서 직접 선발한 음악 관련 전공자들이 집까지 찾아간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워 홍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습 기간 동안 SK에서 판매하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과 같은 고가의 악기들을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또 자체적으로 지역대회를 주최해 회원들 간의 이벤트를 주도하는 등의 ‘통 큰’ 서비스로 동네 민심으로 파고들고 있다.
대기업들은 생활의 틈새를 파고든 영세사업뿐 아니라 소모성 자재 제작에까지 뛰어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침해 사례가 접수되는 곳은 골판지 상자 제작 사업이다. 현재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알미늄을 비롯해 농심 계열사인 율촌화학, 한화 계열사인 부평판지, 삼양식품 계열사인 프루웰, 오리온 계열사인 동양제과공장, 애경 계열사인 애경PNT, 농협 등은 골판지 상자 제조업체를 비계열사로 두고 있다. 골판지 상자 제조업의 경우 장치사업으로 5만 평 정도의 부지가 필요할뿐더러 특수기술이 있어야 하는 사업이라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은 사업에 속한다. 한 해 수요가 일정한 데다 이미 국내에 100여 개 업체가 영업을 하고 있어 대기업들이 뛰어들 만한 신규사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대기업이 비계열사 형태로 골판지 업체들을 인수하고 있어 동종업계 사이에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자본력을 이용해 기업을 인수한 후 대기업들이 매매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추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12월 16일 기자와 통화한 골판지 업계 관계자는 “손쉽게 제조공정을 지닌 중소업체를 인수한 후 가격을 말도 안 되게 낮춰 거래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어 공정거래위원회에 관련 기업에 대해 계속해서 신고하고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중소 상조업계 역시 틈새를 파고 든 대기업 로고의 등장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보안업체 에스원이 장례업 진출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소식이 지난 3월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원은 고령화시대에 맞춘 신사업의 일환으로 분묘 분양 및 장례 서비스와 노인복지시설 운영을 사업추진계획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의 브랜드 효과를 이용해 노년인구를 타깃으로 여생 및 사후까지 모두 관리해주는 기업형 토털 서비스센터가 출범할 조짐이다. 이 경우 상조업계는 물론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버사업에 뛰어든 중소 사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먹을거리’ 사업은 영세사업자들이 목줄을 조이고 있는 상황이다. CJ그룹 계열사인 푸드빌과 SPC그룹이 패밀리레스토랑, 비빔밥 전문점, 면요리 전문점, 아이스크림점, 커피숍 등 다양한 먹을거리 업종들을 종목별로 조금씩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GS리테일 역시 2007년 명동에 오픈한 미스터도넛이 인기를 끌자 2008년 이를 인수해 12개의 가맹점을 열고 간식사업에 진출한 상태다. 이러한 대기업들의 먹을거리 사업은 동네상점은 물론 백화점 내 식당 칸, 기차역, 지하철역까지 소리 없이 점령하고 있다. 백화점 내 푸드코트에서 지난 10년 동안 자체 브랜드로 분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48)는 “백화점 측이 최근 고급 딤섬가게가 입점할 것이라며 계약기간이 끝나면 분식점을 정리해 달라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해왔다”고 푸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일유업이 푸드코트 사업에 뛰어들어 메뉴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어 영세업자들의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다.
불황을 타지 않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는 사교육 시장에도 대기업의 진출이 늘고 있어 ‘동네학원’들의 입지 역시 좁아지고 있다. 사교육 시장에 첫 테이프를 끊은 곳은 현대자동차그룹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입시학원인 종로학원은 2005년 창업자 정경진 씨의 장남 정태영 씨가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사위가 됨에 따라 특수관계인 규정으로 자연스럽게 현대차 계열사로 편입됐다. 다른 대기업 역시 사교육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막강한 자본력을 이용해 성황 중인 학원들을 인수한 후 인기강사를 영입하는 등 경쟁력 제고에 주력하고 있는 형국이다. 대상그룹은 더체인지, 교육과미래홀딩스, 비비코, 우리교육 홀딩스, 이아이에프, 제일교육, 지유문화, 프라임에듀, 한국영재에듀 등을 인수해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나선 상태다.
SK컴즈 역시 청솔학원을 통해 교육 사업에 진출했다. KT그룹은 KT에듀아이를, 삼성SDS의 경우는 크레듀를 인수해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웅진그룹 역시 사교육 시장 인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웅진씽크빅은 2년 전 영어 출판사업과 학원 운영을 통합, 관리하는 영어사업단을 출범해 플러스어학원 등 3개 학원을 인수한 데 이어 최근에는 ‘왕수학 교실’로 유명한 교육기업 에듀왕을 170억 원에 인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교육 시장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대기업이 영세사업자들의 영역까지 넘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취재결과 10대 대기업 중 예식장, 악기 레슨, 중고차매매업 등 영세한 사업 분야에 가장 활발히 진출한 곳은 SK그룹이었다. 이에 대해 12월 6일 기자와 통화한 SK 관계자는 “OK 캐시백 사업의 일환으로 회원들이 누릴 수 있는 생활 서비스 산업들로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주력사업에 관련한 상품을 소비하는 고객들이 포인트를 적립한 후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활로를 찾다보니 소비자들의 실생활에 와 닿는 사업을 구상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영세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수익창출이 목적이라기보다 SK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한층 더 다가가려는 서비스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의 입장에선 고객유치를 위해 동네시장에 가격대를 낮춘 ‘통 큰’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중소·영세업자들은 생계를 위협받는 위기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분야와 종목을 가리지 않는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으로 ‘동네 가게’가 들어설 자리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월 14일 기자와 통화한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는 “2006년도까지는 ‘중소기업고유업종제도’가 존재해 소상공인들의 사업영역에 대한 대기업의 투자를 억제할 수 있었지만 이 제도가 폐지된 후엔 그야말로 아무런 제재수단이 없는 실정”이라며 “소상공인들 대부분은 회사를 퇴직한 후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자기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인데 대기업들이 그나마 존재하던 활로마저 집어 삼키기 시작하면 어떤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다행히 이번 ‘통큰치킨’ 사례를 계기로 지난 12월 13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을 해소할 관리기관으로 동반성장위원회가 출범했다. 12월 15일 기자와 통화한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향후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선정해 대기업들의 진출 억제를 권고할 방침이고, 구체적인 밑그림을 마련하는 중이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동반성장위 출범과 함께 사라지다
롯데마트가 출시했던 ‘통큰치킨’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지난 15일 판매가 종료됐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통큰치킨’은 당초 9월경에 출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8월 이마트가 전격적으로 ‘이마트 피자’를 내놓으며 선수를 치자 롯데 측에서는 오히려 출시를 더 늦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마트에 이어 곧바로 출시할 경우 후발주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데다, 이마트 피자에 대한 업계의 반응을 지켜봐야 한다는 내부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의 롯데마트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이마트는 유통업계 라이벌이다. 두 업체는 올해 초 삼겹살 가격을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 바 있다.
롯데 측이 통큰치킨의 출시 시기와 가격 등을 결정하기까지 이러한 이마트와의 경쟁 구도를 크게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 내부에서는 치킨업계의 반발 등 사회적 논란을 우려해 6000원대 후반 정도로 판매가격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으나 결국 판매 가격은 이마트 피자(1만 2000원)의 절반 이하였다.
▲ 지난 13일 동반성장위원회 출범식에서 정운찬 위원장(가운데)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반향에도 불구하고 판매를 종료하기로 결정한 것은 최근 불고 있는 대중소기업 상생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롯데가 판매 종료를 결정한 13일, 정부에서는 정운찬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반성장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회는 중소기업 적합업군을 발표하는 등 중소기업 대책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었다. 만약 이날 오전 롯데마트가 판매 종료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으면 그 불똥은 상생위원회로 튀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유통업계에서는 롯데 측의 결정이 정부의 동반성장위원회 출범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하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