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부유층 인사들이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 위조된 영주권을 사용해 드나들면서 900억 원이 넘는 돈을 상습 도박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
“외국인 전용 S 카지노 VIP룸의 진짜 큰 손은 국적만 바꾼 한국인이다. 온두라스 등 중남미 영주권을 불법 취득한 한국인들이 거액을 베팅하고 있다.” S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하고 있는 박 아무개 씨(여·28)의 주장이다. 그는 또 “외국인 전용은 이제는 말뿐이다.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은 허울만 큰손일 뿐 카지노에 상주하면서 큰 판돈을 굴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국적 세탁자’들이다”고 덧붙였다.
이 딜러의 말처럼 우리나라 16개 카지노의 ‘외국인 전용’ 타이틀이 무색해진 사건이 발생했다. 위조된 영주권을 사용해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서 900억 원이 넘는 판돈을 굴린 한국인들이 무더기로 검거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사건에는 전 주한 온두라스 대사가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사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회부유층 인사들의 ‘통큰’ 도박사건 속으로 들어가 봤다.
경찰청 외사국은 지난 12월 16일 온두라스 등 중남미 지역 영주권을 위조해 준 김 아무개 씨 등 카지노 에이전트 2명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또한 경찰은 다른 에이전트 13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한 데 이어 미국으로 달아난 위조책 이 아무개 씨 등 2명을 수배하고 미국 이민국에 송환을 요청했다.
위조된 영주권을 사용해 외국인 행세를 하며 900억 원이 넘는 거액으로 국내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서 상습적으로 도박을 벌여온 의사 등 부유층 인사 34명에 대해서는 불구속 입건시켰다. 더불어 외사국은 영주권 위조에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 주한 온두라스 대사인 A 씨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경찰조사 결과 드러난 이들의 기상천외한 범행 행각은 다음과 같다. 김 아무개 씨 등 카지노 에이전트 2명은 지난 2009년 10월경 국내 외국인 전용 카지노 출입을 희망하는 내국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에 위치한 총 17개의 카지노 중 강원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16개의 카지노는 모두 ‘외국인 전용’으로 규정돼 있어 한국 국적인 사람은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출입이 가능한 방법이 있다며 유혹의 덫을 놓았던 것.
이들 에이전트가 노린 주요 타깃은 의사, 건설회사 회장, 여행사 대표, 은행원, 운동협회 회장, 주부 등 직업은 다양했으나 대부분 경제력이 풍족한 국내 상류층 인사들이었다. 경찰에 적발된 34명 중에는 유명 여성 체육협회장인 L 씨와 대형 건설회사 대표인 M 씨 등 사회 지도층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담당 형사인 강인석 경정은 16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이들 인사들이) 강원랜드나 외국 카지노는 너무 멀다고 생각해 영주권을 위조해 달라고 부탁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브로커 김 씨 등은 이들에게 1인당 미화 1만 달러(한화 1200만 원 상당)를 받고 온두라스 등 5개국의 영주권 카드를 위조해 주기로 했다. 실행은 총책인 이 아무개 씨 등이 맡았다. 주한 온두라스 대사관 상무관을 사칭하던 이들은 김 씨로부터 영주권 위조를 의뢰받아 엘살바도르에서 영주권 카드를 위조해 국내로 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적발될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미국 등 제3국을 경유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이렇게 이 씨 등이 영주권 카드를 국내로 들여오면 마지막 바통은 대사관에서 이어받았다.
도박 피의자들을 조사하던 경찰청 외사국은 온두라스 대사관이 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됐다. 도박 피의자들이 “A 전 대사가 브로커들에게 술 접대를 받는 모습을 보았다. 확인서 한 장당 100만 원씩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공통된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브로커들의 계좌를 추적했고, 이들이 A 전 대사와 금전 거래를 한 내역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은 금액이라 혐의를 잡기는 어려웠지만 빈번한 거래 내역만으로도 브로커들과 A 전 대사의 친분관계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란 게 경찰의 판단이다.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운 A 전 대사는 위조된 영주권 카드가 마치 적법하게 발급된 영주권 카드인 것처럼 확인해 줬다. 경찰청 외사국이 확보한 ‘대사관 민원대장’에 따르면 A 전 대사는 영주권 카드의 합법성을 증명하는 확인서를 내주면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도 자세한 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여권과 다른 이름이나 성별 등이 기재되어 있음에도 신청을 거부하지 않고 확인서 발급을 보류했다가 수정해 신청하면 다시 발급해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외사국 관계자는 지난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대사관뿐만이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 관계자도 관계됐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렇게 발급받은 영주권은 모 회사 대표, 의사, 체육단체장 등 우리나라 상류층 인사들이 안심하고 도박판을 벌일 수 있는 ‘입장권’으로 둔갑했다. 이들이 지난 10개월간 강남의 S 카지노, H 호텔 카지노 등에서 칩으로 교환해 도박에 쓴 돈은 무려 913억 원에 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에는 한 사람이 270억 원 상당의 카지노 칩을 구입하기도 했고, 40억 원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S 카지노 딜러 박 아무개 씨는 “외국 영주권을 소유한 한국인은 카지노에서 VIP로 대접받았고 이들을 위한 룸이 위층에 따로 마련될 정도”라며 “이들이 돈을 잃으면 호텔과 연계된 중간책이 돈을 빌려주면서 도박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했다.
경찰은 미국으로 도피한 위조 총책 이 씨 등 2명을 수배한 뒤 국내 송환을 요청하는 동시에 A 전 대사의 결탁 여부 확인을 위해 온두라스 정부와 공조 수사를 벌여 나갈 계획이다. 또 국내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알선 브로커 조 아무개 씨 등 4명의 소재를 추적하고, 영주권 카드 위조 혐의로 수사 물망에 오른 52명에 대해서도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우선미 기자 wihts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