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은행은 직원 두 명의 사기 대출 사건으로 3000억 원대의 채무를 졸지에 떠안게 됐다. 사진은 경남은행 서울지점.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경남은행에서 전례 없는 최악의 금융사고가 터졌다. 다수의 제2 금융권이 연루된 것은 물론 변호사와 브로커들이 뒤엉켜 빚어진 이번 사건은 금융사고 금액이 무려 4000억 원이 넘는 등 개인이 연루된 금융비리 사상 최대 규모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번 사건에 경남은행을 비롯해 16개의 저축은행이 은행직원 2명의 주도하에 벌인 금융사기에 고스란히 넘어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은행 내부인뿐만 아니라 변호사와 브로커, 기업대표 등 23명이 총망라되어 이뤄졌고, 그 수법 또한 기상천외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12월 22일 경남은행 간부 2명 등 관련자 7명을 횡령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사건에 연루된 1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백화점식 비리 양상을 띠며 금융비리의 종합판으로 기록될 이번 사건의 전말을 취재했다.
사건은 전 경남은행 장 아무개 부장(44)과 조 아무개 과장(39)이 물욕에 눈이 먼 나머지 업무규정을 위반하면서 비롯됐다. 장 부장 등은 2008년 4월 고객의 은행신탁 자금을 개인적으로 몰래 빼돌려 비상장회사의 지분인수 등에 투자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손실을 입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손실금을 막을 길이 막막한 데다가 자신들의 업무상 일탈행위가 발각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제2 금융권 대출을 받아 원금 돌려막기 작업에 착수했다. 장 부장 등은 2008년 10월부터 올 4월까지 16개 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5개 기업들로부터 특정금전신탁 자금을 끌어들여 투자손실을 메우려 했다. 이들은 여러 은행을 통해 마련한 대출금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동시에 코스닥 상장사 인수 및 리조트 사업 투자를 하는 등으로 손실금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거듭된 투자실패와 대출이자 누적, 알선료 등의 비용 급증으로 부실규모는 불과 1년 6개월 만에 3200억 원을 넘어서는 등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장 큰 문제는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금으로 인해 추가대출이 필요해진 이들이 신규로 대출을 받기 위해 사용한 수법이었다. 장 부장 등은 브로커들과 짜고 자신들이 세운 유령회사와 자금관리를 맡은 업체 등을 내세워 제2 금융권으로부터 사기대출을 받았다. 특히 거액의 대출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대출금 상환을 책임지겠다는 경남은행장 명의의 위조 지급보증서를 꾸몄고, 이를 이용해 2630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또 5개 기업을 상대로는 은행장 명의로 원리금을 보장한다는 위조 확인서를 발급해주고, 1247억 원의 신탁투자를 유치했다. 이들로 인해 경남은행이 졸지에 떠맡게 된 보증책임은 3262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의 범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적발한 비리는 총 30여 건에 달했다. 이들의 수법은 사기대출 자금으로 인수한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고 공제회 기금을 유출해 은행에 투자하고 대가를 수수하는가 하면 대출을 받고도 편의를 제공해주고 금품을 수수하는 등 다양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번 사건에 장 부장 등 은행 내부 직원뿐만 아니라 전문 브로커들과 인수·합병 전문 변호사와 사학연금관리공단 및 건설근로자공제회 관계자들까지 줄줄이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사건에 개입한 금융전문 브로커들은 7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장 부장 등에게 8개 저축은행을 통해 950억 원을 대출받도록 알선해주고, 알선료 명목으로 19억 70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도 개입했다. 송 아무개 변호사는 장 부장 등과 공모해 담보 조건을 속인 채 경남은행 등으로부터 400억 원의 사기대출을 받아 운수회사를 인수한 뒤 회사돈 150억 원을 횡령해 또 다른 기업의 인수합병 자금으로 사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장 부장은 또 지난 3월 재개발 업체를 세운 뒤 경남은행이 투자 원금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가짜 계약서를 첨부한 기업 어음을 발행해 600억 원을 조달하고, 이 중 572억 원을 횡령하는 등 갈수록 대담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장 부장은 전 사학연금관리공단 본부장 허 아무개 씨에게 사학연금 자금 수백억 원을 투자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뇌물 5억 5000만 원을 건네기도 했다.
검찰은 또 수사과정에서 전 건설근로자공제회 이사장이자 현 H 대학 총장인 손 아무개 씨의 비리도 추가로 밝혀냈다.
건설근로자공제회는 건설 일용근로자 320만 명의 일당을 일부 적립해 이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는 단체다. 2008년 320만 명의 건설근로자 회원을 두고 1조 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던 손 씨는 충청남도의 한 골프장을 인수하려는 G 사 대표 S 씨가 경남은행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300억 원을 대출받게 해주고 사례비 명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1억 2000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문제의 골프장은 2008년 6월 개장한 이후 연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회원권 분양도 중단된 상태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건설근로자공제회가 담보로 받은 골프장 주식은 앞서 다른 금융기관에 담보로 제공되어 있었다. 또 추가로 분양되는 회원권 판매수익금 등도 다른 금융기관 대출금을 우선변제하기로 약정돼 있는 것으로 드러나 공제회는 막대한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원금 회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어 건설근로자들의 퇴직금이 한순간에 날아갈 형국에 처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4000억 원대의 대형 금융사고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지급보증서 등을 위조해 신규대출을 받아 돌려막기가 계속됐기 때문에 신탁상품 부실운용 사실이 장기간 적발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이 검찰 측의 설명이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경남은행 측에서는 사건이 터질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나 은행 내부의 감시·감독 시스템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경남은행의 신탁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장 부장과 조 과장 두 명이었는데 은행 측은 이들에게 모든 업무권한을 맡겨두고 특별한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기관에서 중대한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장 부장 등이 대담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장 부장 등은 대출과정에서 대출에 필요한 은행장의 인감증명서를 마음대로 꺼내 쓰는 한편 은행의 보증 증명서와 인감도장, 인감증명서를 모두 위조했지만 경남은행 측은 이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4000억 원대 금융사고와 관련한 은행 측의 허술한 관리·감독 및 대출관리 시스템에 대한 책임공방과 보상문제는 추후 민사소송으로 가려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