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수상한 이세돌 9단 등 프로 기사들이 기뻐하고 있다. |
▲송년회에서도, 시상식에서도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은 내빈들은 한결같이 아시안게임의 쾌거를 치하하면서 그것이 우리 바둑계 재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축원했다.
연말연시는 회고와 전망, 이른바 10대 뉴스 시즌인데, 역시나 2010년 바둑계 뉴스 중에서는 아시안게임 금메달 석권이 단연 으뜸이었다. 프로 아마를 막론하고 이의가 없었다.
▲ ‘2010 아마바둑인의 밤’ 행사 개막 때, 특별 초청 손님 중 한 사람이었던 충남 서산의 서광사 주지 도신 스님은 가수 전인권 씨나 김종서 씨보다도 높은 음으로 우리 가요 두 곡, ‘임의 향기’와 ‘귀거래사’를 열창해 분위기를 띄웠다. 도신 스님이야, 얼마 전에 ‘바둑 명상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과 함께 소개했던 것처럼 앨범을 낼 정도의 노래 실력에다 그림도 잘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라이브로 들어보니 정말 대단한 선곡에 놀랄 만한 가창력이었다. 그리고 노래 전 인사 한마디가 촌철살인이었다.
“대한바둑협회로서는 처음인 송년회 같은데, 아마바둑인이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어요…^^ 프로바둑인 따로 있고 아마바둑인 따로 있는가 해서요…^^ 그냥 바둑인의 밤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제 생각입니다…^^”
그렇다. 아마바둑인은 좀 어색하다. 프로바둑인, 아니 프로기사 중에서는 아시안게임의 우리 낭자군, 이민진 5단과 김윤영 2단, 해외통 천풍조 8단이 보였다.
▲ ‘아마바둑인의 밤’ 시상식에서 조건호 대한바둑협회장이 이호승 선수에게 최우수기사상 트로피를 전달하는 모습. |
▲ 2010 바둑대상은 이세돌 9단에게 돌아갔다. 이세돌 9단은 기록으로 말하는 공격 4개 부문 가운데 최다대국을 제외한 최다승(74승 16패), 승률(82.2%), 연승(24연승)을 휩쓸면서 대상인 최우수기사상을 차지해 4관왕, 2010년이 자신의 해였음을 과시했다. 2009년 하반기 휴직계를 낸 것이 오히려 약이 되었던 것.
지난호에 소개했던 허영호 8단이 감투상, 아시안게임 감독 양재호 9단이 시니어 기사상, 아시안게임을 전후해 ‘바둑 요정’으로 불리며 최근에는 잡지 표지 모델, TV 오락프로 게스트 등으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이슬아 초단이 여자기사상을 받았다. 이슬아 초단이 여자 연예인들처럼 약간 노출을 하고 찍은 사진들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팬들에게 예쁘고 깜찍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그런데 잡지나 광고 쪽에서는 여자라면 왜 그렇게 그런 방향으로만 먼저 생각하는지. 아무튼 여기도 아시안게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인데, 모든 게임에 출장했던 박정환 8단, 난공불락 루이나이웨이를 격파한 이민진 5단에게는 바둑팬들이 대신 미안해하는 모습.
그보다 팬들이 더 서운하게 느끼는 것은 이창호 9단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 예전에는 수훈상이나 인기상 같은 것도 있었고 이창호 9단은 최우수기사상은 물론 거의 매년 인기상도 받았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는 걸 실감하는 대목이다. 그건 그런데 수훈상, 인기상 같은 것은 왜 없앴는지. 의무적으로 무성의하게 나누어주는 게 아니라면 상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원성진 9단이나 김지석 7단, 박지은 9단이나 박지연 2단 같은 경우도 2010년 시즌에 뛰어난 활약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기사들인데, 아쉽게 되었다. 다른 동네에서는 상을 못 주어 야단인데 말이다.
▲ 대바협 행사에는 프로기사에게 주는 상이 없었지만 한국기원의 바둑대상에는 ‘아마기사상’이란 게 있다. 대바협 행사에서 이호승 선수 다음에 장려상을 받았던 박영롱 선수(21)가 수상했다. 프로-아마 양쪽에서 상을 받은 것. 박 선수는 2010년 시즌에 아마추어 대회보다는 제38기 하이원배 명인전, 제2회 BC카드배, 2010KT올레배, 주로 프로-아마 오픈전에서 본선에 진출했고, 본선에 올라가서는 프로기사를 심심찮게 꺾어 ‘프로 잡는 아마’로 이름을 날렸다. 아마 대회 성적은 2010수원시장배 3등, 제3회 노사초배 3등 정도.
▲ 그 박영롱 선수를 박 선수의 고향 바둑팬들이 후원하자고 나섰다. 박 선수의 고향은 당진. 당진은 예전에는 오지였는데,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고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하면서 급속히 개발이 된 지역.
우리 옛 문헌에서 바둑 관련 이야기나 기록을 발굴·해석·소개하는 데 독보적 역량과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재야 바둑사학자 이청 씨(49)와 시니어 아마바둑 정상권의 강자 박성균 7단(53)이 당진 주민과 바둑팬들에게 박 선수의 후원을 역설하고 있다. 이청 씨는 얼마 전에 당진으로 이사 와 살고 있고,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유소년 바둑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 박 7단은 당진 바둑인들과의 인연으로 이곳 바둑 보급을 위해 최근에 자리를 잡은 것인데, 좁은 당진 바닥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진 바둑팬들은 박영롱이 누군지, 그가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으로 프로 입단이 유망한 기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이청 씨의 주선으로 당진의 지역신문인 <당진시대> 2010년 12월 6일자에 박영롱 선수와 박 선수의 부친 박용빈씨, 박 선수의 어릴 적 바둑 스승 박재웅 씨의 인터뷰 기사가 대서특필로 실리면서 당진 바둑팬들이 “우리 고장에서도 프로기사를 한번 배출해 보자”고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
흐뭇한 소식이다. 이렇듯 프로와 아마는 별개 동네가 아니다. 아마는 밭이며 프로는 꽃이다. 아시안게임의 쾌거, 바둑의 스포츠화 성공이 어쩌면, 거꾸로 한국기원과 대바협 사이의 공로 경쟁이나 바둑계 주도권 다툼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
아시안게임 바둑대표단을 인솔한 것은 대바협이었으나 태극마크의 주인공은 감독 코치 선수 모두가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과 구조였겠지만, 어쨌든 바둑팬들은 한국기원과 대바협의 멋진 합작에 환호하면서 2011년에도 두 단체가 더욱 상생호혜의 정신으로 같이 상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낙관할 수만도 없고 우려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면 이루지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