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스퍼 전 IOC 부위원장과 필자. |
호주의 경우 스포츠에 있어서 아시안게임에 속해 있지도 않고, 미주처럼 판아메리칸게임이나 아프리카의 아프리칸 게임도 없어 올림픽 이외는 종합경기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고, 다른 문화가 교류할 수 없다. 그나마 영연방대회를 통해 국제대회 출전 갈증을 해소하는 것으로 안다.
이런 호주가 멜버른 및 시드니 하계올림픽을 개최하고, 호주 올림픽위원회가 당당히 세계 속의 우수한 올림픽위원회로 인정받고, 동계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따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배경에는 바로 케빈 고스퍼 전 IOC 부위원장이 있었다. 고스퍼는 IOC위원뿐 아니라 대양주 NOC연합회 회장으로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최근의 일로 아쉬운 것은 2022년 FIFA월드컵을 호주가 딸 것이라고 세론에서 떠들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존 코우츠 IOC 집행위원 겸 호주 NOC 위원장이 캐나다의 막강한 딕 파운드 IOC 위원을 제치고 국제스포츠 중재재판소의 소장이 당선되기도 했다.
케빈 고스퍼는 1933년 시드니에서 태어나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호주 뉴캐슬 대학과 멜버른 공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다양한 능력을 지녀 스포츠 영역 밖에서도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석유회사인 셸의 호주 회장, 호주 무역위원회 부위원장, 런던의 셸의 국제본부 이사, 멜버른 시장 등을 역임했다.
육상 출신으로 키가 큰 고스퍼는 선수로 영연방게임에서 400m 금메달, 1956년 멜버른올림픽 1600m 계주 은메달, 1960년 로마올림픽 육상팀장 등을 지냈다. 파푸아뉴기니 연방게임 사무장을 지내는 등 대양주 체육진흥에 무척 공을 들인 고스퍼는 1980년에는 호주체육회 창립회장 그리고 1985년에서 90년까지 호주 올림픽위원장을 맡았다. 그때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1990년 IOC총회에서 멜버른올림픽 유치를 시도했으나 애틀랜타와 아테네의 틈에서 실패했고 1989년부터 2009년까지는 대양주올림픽연합체 회장으로 일했다. 이후 시드니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남아공화국의 올림픽 복귀나 동티모르의 올림픽 복귀문제 등에는 앞장서서 직접 뛰어다녔다.
고스퍼는 사마란치 전성기 때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IOC 신문위원장 등을 맡아 사마란치를 뒷받침했던 핵심 참모라고 할 수 있다. 혈통은 영미계지만 미국과도 다르고 영국과도 조금 다른 인상을 풍기는 스포츠맨, 체육지도자, 행정가, 경제인이었다. 성격은 신사다우면서도 불같은 데도 있었다. 늘 부위원장으로서 단상에서 위원들 질문에 답할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려다보는 인상이 사람들에게 반감을 주기도 했다.
바덴바덴 전에 앞으로의 IOC의 지도층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람은 캐나다의 파운드, 호주의 맥켄지였는데 맥켄지가 하와이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호주의 고스퍼가 뜨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 준비사항은 IOC 집행위원회가 있을 때마다 보고하고 질문에 답변을 했다. 처음 한두 번은 노태우 위원장과 박세직 위원장이 담당했지만 그 후에는 주로 필자가 김삼훈 국제국장(후에 유엔대사)과 문동후 경기 조정관(현 대구세계육상 사무총장) 그리고 박대원 과장(후에 알제리아 대사, 현 KOICA 이사장) 등을 대동하고 가서 보고하고 답변했다. 제일 까다롭게 질문한 사람이 늘 고스퍼였다.
고스퍼와 친해진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멜버른이 1996년 올림픽 개최를 위해 1990년 도쿄 IOC총회에서 아테네, 애틀란타, 맨체스터 등과 겨루기 위해서 공작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호주 올림픽위원장이었고 지금의 IOC 집행위원인 존 코우츠가 부위원장, 필 콜스 IOC 위원이 사무총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유치는 고스퍼 주도로 이뤄졌고 몇 사람을 거점으로 보고 집중 공작을 했다. 필자도 그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았다. 당시 실은 사마란치가 1996년 즉 100주년 기념 올림픽은 아테네에서 하는 것이 좋다며 아테네를 뒤에서 밀라고 필자에게 권고하고 있었다.
고스퍼는 필자와 함께 IOC 집행위원이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도쿄 IOC총회 전에는 필자가 망막 수술을 받고 세브란스 병원에 장기 입원하자, 고스퍼가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선 관심을 표하곤 했었다.
고스퍼가 노력하고, 또 사마란치는 아테네를 밀었어도 1996년 올림픽 개최권은 애틀랜타로 갔다. 애틀랜타에 모두들 초청받았는데 필자는 안 갔다. 서울에 온 유치위원을 필자가 초청 대접했더니 불안했는지 당시 그레그 주한 미대사가 관저로 초청해 애틀랜타를 부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고스퍼는 도쿄 총회에서 IOC 부위원장이 되었다. 멜버른이 떨어지고 고스퍼가 부위원장에 당선되어도 호주에서는 부위원장 되기 위해 멜버른을 희생시켰다는 공격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3년 후인 1993년 부위원장으로서 몬테카를로 IOC 총회에서 멜버른이 아닌 시드니를 앞세워 키튼 총리와 함께 결선에서 중국의 베이징을 2표차로 물리치고 2000년 올림픽을 따냈다. 선진국형 승부다. 이겼다고 혼자 다 한 것같이 처신하는 사람도 없고 져도 다음을 기약하고 준비한다. 우리나라가 배워야 할 점이다. 시드니가 올림픽 개최권을 딴 후에 도와주었다고 생각되는 IOC 위원 10명을 초청했는데 필자는 안 갔다. 중국 보기에 모양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고스퍼는 94년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올림픽에서는 제1부위원장으로서 사마란치가 코소보 시찰을 갔을 때는 위원장 대리로서 동계올림픽을 4일간이나 관리했고 시드니올림픽 유치가 시작된 후에는 각국에서 열린 국제 행사에 초청이 됐건 안 됐건 찾아갔다. 어떻게 보면 호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릴레함메르 기간 중에 같은 호주 IOC 위원인 콜스가 필자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바람에 고스퍼의 오해를 사서 격돌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지만 곧 원상회복이 되었다. 콜스는 그후 IOC TV위원, 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도 시켜주었는데 고스퍼와 코우츠에 밀려 호주내 위상이 엉망이라고 들었다.
그 해 가을 파리의 100주년 IOC총회에서는 필자와 함께 IOC 부위원장 4명이 1 세션(Session)씩 맡아 일을 처리했고 태권도 올림픽종목 채택도 도와주었다. 다음 올림픽이 시드니였기 때문에 시드니조직위원회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회의 기간 중에 사마란치 방에 아무 때나 제일 자주 들르는 것이 고스퍼였다.
고스퍼도 사마란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로 캐나다의 파운드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파리 IOC 총회 기간 중 뇌출혈로 수술을 받아서 그런지 모스크바 총회에선 출마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같은 영미 계통인 캐나다의 파운드를 지원한 것 같다. 모스크바에서의 IOC 위원장 선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마란치가 로게를 위해 선거법도 특별하게 만들고 필자를 투표 직전에 윤리위원회를 시켜 10분간 공격도 했다. 선거 후에 고스퍼는 그런 일이 없이 끝까지 갔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호주는 아시아경기나 미주게임 같은 대륙경기가 없어 늘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고스퍼와 후임 올림픽위원장 존 코우츠의 요청을 들어 어렵게 2001년 오사카 동아시안 경기에는 호주도 참가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스퍼는 경제인이기 때문에 한호교역에도 관심이 많았고 남아공화국의 올림픽 복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음바예 부위원장과 함께 남아공화국 방문. 만델라와 그 반대파를 만나 관계를 조정, 참가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를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남아공화국 참가는 물론 안 되었고 남아공화국 임원이 신라호텔에 들어오면 추방하라고 사마란치가 지시까지 했다. 하지만 만델라가 석방되고 전면에 등장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게 정치는 무상하다. 격세지감이 든다. 그 덕에 이제 남아공화국은 월드컵 축구도 개최하고 얼마 안가서 올림픽을 개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필자는 IOC TV분과위원장이고 고스퍼는 신문분과위원장이어서 협조할 일이 많았다. 방송은 방송이 잘 되어 올림픽운동이 확산되도록 해야 했고, 신문은 늘 불만이 많은 기자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ID, 숙소, 프레스센터의 복잡한 문제, 수송 등 다루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방송이나 신문이나 위원회를 따로 운영했지만 고스퍼 제안으로 합동 미디어위원회를 만들어 둘이 교대로 통합위원장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고스퍼는 육상선수에서 올림픽위원장, 셸 석유회사 대표, 멜버른 시장, 그리고 IOC 위원에서 IOC 집행위원, IOC신문분과위원장, IOC 부위원장을 거치면서 변방이던 호주체육을 세계 정상급으로 일으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개최했다. 한 일이 많았던 만큼 고스퍼는 20세기 사마란치 시대의 거물로서 국제스포츠계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참고로 시드니올림픽은 우리에게도 특별하다. 태권도가 처음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전 세계에 첫선을 보였고, 50년 만에 남북올림픽 선수단이 전 세계의 갈채를 받으며 같은 유니폼을 입고 ‘KOREA’라는 국가 표식판을 들고 역사적인 동시입장을 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아시안경기 때 한국팀 팻말을 보니 R.O.KOREA로 되어 있어 놀랐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고, 특히 한국사람들은 잘 잊어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소중한 일들은 좀 제대로 간직했으면 좋겠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