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부회장 | ||
그로부터 59년이 흐른 2004년 10월. 롯데는 한국과 일본에서 5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롯데의 절대군주는 올해 83세의 신격호 회장이었다. 물론 지금도 롯데그룹 안에서는 신 회장의 힘은 절대적이다. ‘신격호=롯데’의 등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까지 롯데는 적어도 2세구도에 대한 질문에는 함구했다. 신 회장이 건재한데 무슨 2세구도냐는 핀잔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 롯데에 2004년 10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2세 경영체제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일본으로 나간 뒤 근 10개월 만인 지난 8월21일 귀국한 신격호 회장은 지난 10월3일 일본으로 재출국했다.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셔틀경영을 하고 있는 그는 한 달 반간의 한국 경영을 마무리하면서 롯데호텔 정책본부 신설과 그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의 정책본부 본부장 임명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일본으로 떠난 것.
정책본부는 다른 그룹으로 따지면 구조조정본부에 해당한다. 롯데호텔 소속이긴 하지만 롯데그룹 계열사를 관리하는 경영본부인 셈. 이 조직을 호텔에 둔 이유는 롯데호텔이 외투법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행법상 외투법인은 한국 정부의 간섭을 덜 받는다. 교묘한 몸 숨기기인 셈이다.
이곳의 책임자로 신동빈 부회장을 앉힌 것은 신 부회장이 그룹 경영전반을 책임지게 한다는 얘기다. 때문에 재계에선 이를 롯데의 본격적인 2세 경영의 서막으로 보고 있다.
우연찮게도 일본 롯데도 지난 5월 집행임원제(8명)를 도입했다. 이중엔 신 회장의 큰 아들인 시게미쓰 히로유키(신동주) 부사장의 참모로 분류되는 3명이 포함돼 있어 후세 경영을 위한 포석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결국 신 회장이 10개월 만에 귀국해 한국 롯데의 경영을 맡고 있는 신동빈(일본명 시게미쓰 아키오) 부회장의 경영 참여의 폭을 제도적으로 넓히는 틀을 만든 것이다.
한국 롯데에만 국한할 경우 신동빈 부회장의 부상은 기존 경영인맥의 퇴진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롯데그룹은 정책본부 신설을 발표하기 직전인 지난 9월 말 임승남 롯데건설 사장(66)이 롯데호텔 상임고문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발표를 했다. 롯데 공채 출신인 임 전 사장은 98년 롯데건설 사장을 맡아 매출액을 7천억원에서 2조2백억원으로 세 배 이상 키워낸 인물. 신 회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25년간 직업이 ‘사장’이었던 최장수 CEO였다. 그런 그가 급작스레 별다른 보직 없이 ‘고문’으로 옮긴 것은 ‘퇴진’으로 받아들여진 것. 일각에선 그의 ‘퇴진’을 두고 오너 경영진과 ‘불화’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는 임 전 사장이 지난 7월 대선 불법 자금 제공과 관련해 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를 받아 건설회사 대표이사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임 전 사장은 비자금 조성 및 법인세 포탈 혐의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현행 건설산업 기본법에 따르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대표이사직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 판결이 있은 지 두 달 넘게 있다가 갑자기 지난 추석 연휴에 사표를 냈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퇴진은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재계에선 임 전 사장의 퇴진을 롯데 원로 경영진의 퇴진으로 보고 있다. 올 들어 롯데의 러시아사업 본부장을 맡게 된 장성원 전 롯데호텔 사장(74)이 러시아 사업에서도 물러났다. 김부곤 롯데칠성음료 전 사장(70)도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틈에 신 회장은 한국 롯데의 명실상부한 사령탑으로 롯데호텔 정책본부를 만들었다. 정책본부장에는 신동빈 부회장이, 부본부장에는 김병일 롯데호텔 사장이, 국제부문 담당에는 신 회장의 5촌 조카인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을 포진시켰다.
지난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한국 롯데에 명함을 내밀었던 신 회장의 차남이 근 15년 만에 경영일선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지난 97년에는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그 무렵부터 비교적 소규모 계열사인 롯데닷컴과 세븐일레븐의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그룹의 중심에서는 한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지난 3월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와 롯데가 최근 들어 가장 거액을 들여 투자하고 있는 호남석유화학의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해 그의 전면등장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신동빈 부회장의 롯데 정책본부장 임명은 한국 롯데의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신 부회장으로 쏠리게 될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때문에 현재 롯데에 몸담고 있는 신 회장 인척들의 향후 입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 회장은 형제들을 롯데 경영에 참여시키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 독립시켜 롯데와 관계를 끊게 했다. 유일하게 롯데 경영에 남은 직계가 아닌 신 회장의 인척은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 하지만 그는 이번 인사에서 국제 부분을 맡아 한국 롯데의 ‘내치’에선 한발짝 물러나게 됐다.
신 회장의 행보와 2세구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