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창진 감독이 만든 최고의 히트 상품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부산 KT 소닉붐 포워드 박상오 선수를 13일 수원 훈련장에서 만나봤다. 임준선 kjlim@ilyo.co.kr |
박상오는 입담꾼이었다. KT 프런트 이상국 대리가 “박상오는 ‘취중토크’를 하면 훨씬 더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선수다”라는 귀띔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알게 해줬다. “내가 좀 분위기 메이커이긴 하다”는 말로 ‘자뻑’ 수치를 높이더니 “내가 갑자기 잘한 게 아니라 원래 잘하던 선수였다”며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다 “이전에는 개인기에만 의존했는데 전창진 감독님이 오신 후 팀플레이를 배우면서 더 잘하게 됐다”는 말로 이내 전 감독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고공행진의 비결은?
박상오한테 올 시즌 고공 행진을 하고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는 시즌을 앞두고 강행했던 기초체력훈련과 태백전지훈련을 꼽았다.
“태백 훈련을 하러 가기 전에 원주와 부산에서 기초 체력훈련을 다졌다. 육상트랙을 4바퀴 돌면서 매번 기록 단축을 해야 했는데 한번은 나 때문에 다른 선수들이 감독님께 무진장 깨졌다. 나만 시간을 단축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날 김승기 코치님께서 ‘오늘 상오가 기록내면 저녁에 사우나 갔다가 시원하게 맥주 한 잔 쏘겠다’며 미끼를 던지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를 악 물고 뛰었더니 1분5초 안에 들어와야 하는 시간을 1분3초에 끊었다. 그때 느낀 게 이를 악 물고 하면 못하는 게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지금도 이 악물고 뛰고 있다(웃음).”
농구계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태백전지훈련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랑 재활 중인 (송)영진이 형, 도수 형은 꼴찌 전담반이었다. 감독님이 ‘몸 아픈 선수들은 이해가 되는데 왜 너는 맨날 늦게 뛰는 거냐?’며 많이 채근하셨다. 한번은 감독님께서 오셔선 ‘상오야, 지금의 힘든 걸 극복하고 나면 올 겨울이 따뜻하고 행복할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땐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금은 확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난 시즌 끝나는 게 두렵다. 시즌 후에는 또다시 그 지옥의 훈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차라리 시즌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오프시즌 없이 말이다.”
취재기자도, 사진기자도 박상오의 넉살에 한참을 웃었다.
농구를 포기한 사연
박상오는 중·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에이스로 꼽혔다. 중3 때의 키가 지금의 196㎝였다고 하니, 그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저절로 상상이 됐다. 그러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시련의 나날을 맞이하게 된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까 선수들이 국가대표급이었다. (김)주성 형, (송)영진이 형 등 날고 기는 선배들이 있으니까 내가 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날 뽑으셨던 김태환 감독님마저 프로팀으로 가시는 바람에 새로운 감독님한테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결국 숙소 탈출을 감행했다.”
박상오는 대학 2학년 때 농구를 그만두고 현역 입대를 자원했다. 그 사연이 구구절절하다.
“세 번째 숙소를 도망쳐 나왔다가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마지못해 다시 기어들어갔는데 이번에는 1학년 신입생 중에 205㎝의 김광원(인삼공사)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아, 내가 설 곳은 없구나. 영진이 형, 주성이 형이 졸업해도 내가 뛸 수는 없겠구나’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감독님을 찾아뵙고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감독님도 날 완전히 사고뭉치로 인식하고 계셔서 그런지 붙잡지 않으시고 선뜻 내보내주셨다. 그때 안성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뒷자리 앉아서 1시간 내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박상오는 차라리 군 문제나 해결하자는 마음에 자원 입대를 했고 전투 식량병 보직을 맡아 25개월을 근무했단다.
“전투 식량병으로 일하면서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군대에선 팔뚝도 엄청났다. 혹시 막노동 근육이란 걸 아나? 내 안에는 그 근육들이 쌓여 있다(일동 폭소). 더욱이 훈련이 끝나면 무조건 축구를 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맡아 맹활약을 펼치다보니 심폐기능이 향상됐다. 전투 식량병으로 대우받으면서 생활했고, 축구 스트라이커로 윗분들의 사랑을 받다보니 제대하는 게 싫어지더라. 농구도 그만둔 마당에 할 수만 있다면 군에서 말뚝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5년 만의 대학 무대 데뷔전
▲ 지난 6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인천전자랜드와의 경기에서 박상오가 수비를 피해 슛을 하고 있다. |
“당시 강정수 감독님이 계셨는데 일주일만 테스트해보고 결정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집에 가란 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등록 선수로 계속 훈련만 하다가 이듬해 3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정식 농구부원이 됐다.”
역시 처음부터 주전으로 뛰진 못했다. 3학년 동기생인 함지훈(모비스 소속, 현재 군 입대)이 펄펄 날고 있던 때라 주전 자리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다 6월 원주시장배대회 때 함지훈이 허리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박상오한테도 기회가 찾아왔다.
“감독님(당시 강정수에서 장일 감독으로 교체됨)께서 나한테 기회를 주셨다. 지훈이가 부상당한 후 고려대에 30점 차로 대패한 게 감독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양이다. 다음 경기가 연세대랑 치를 예정이라 더더욱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 2000년 대학 입학 후 2005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대회 출전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 무대 데뷔전이나 다름없는 경기에서 난 29점을 올렸고 그 다음에도 계속 20점 이상의 득점을 올렸다. 결국 중앙대는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난 처음으로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한마디로 인생역전이었다.”
박상오는 중앙대 시절 ‘환상의 궁합’을 선보인 함지훈에 대해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지훈이는 대학 때부터 센스 있게 농구를 잘했다. 지난해 MVP 타는 걸 지켜보면서 많이 부럽기도 했었다. 프로 신인 때 구단 관계자가 지훈이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농담삼아 ‘우리가 함지훈을 뽑을 걸 상오로 잘못 뽑았다’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땐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심정이었다. 이젠 그 분도 날 뽑은 걸 잘했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전창진 감독의 ‘애정표현’
전창진 감독이 KT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박상오는 “이제, 좋은 시절 다갔다”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고 한다. 훈련량이 엄청나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으로 선수들이 벌벌 떤다는 소문도 각오를 했기에 개의치 않았단다. 문제는 전 감독의 농구가 이해도, 적응도 안 되고, 따라가기도 버거웠다는 사실.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기는 농구, 확률 높은 농구의 의미와 효과를 직접 경험하고 나니까 감독님의 농구가 점점 좋아지게 됐다. 그동안 난 농구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개인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런데 농구는 혼자만 잘해선 절대로 안 되는 종목이다. 그걸 깨우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농구가 잘 돼서 그런지 감독님께서 아무리 뭐라고 야단을 쳐도 기분이 좋다. 그게 감독님만의 ‘애정표현’이란 걸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됐는지, 참 나….”
지난해 7월, 야구장에서 만난 김지나 씨와 힘든 ‘작업’ 끝에 결혼에 성공한 박상오는 ‘아직까지는’ 결혼예찬론자다. 원래는 올 시즌 마치고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4월, 장인어른을 찾아가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운동을 제대로 못할 것 같다”고 ‘공갈포’를 날린 덕분에 7월 웨딩마치를 올릴 수 있었다.
“이 좋은 결혼을 왜 빨리 안 했는지 모르겠다(웃음). 결혼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 정신차리고 농구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올 시즌 꼭 이루고 싶은 것은 팀 우승이다. 그리고 MVP까지 거머쥔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나. 만약 그게 현실로 이뤄진다면 무조건 기자님과 ‘취중토크’할 거다. 소주병 쌓아놓고 제대로 마셔보자.”
마무리하면서 재미삼아 ‘전창진 감독한테 궁금한 거 없느냐’고 물었다. 박상오는 일초도 쉬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여름 태백전지훈련 때 우리랑 같이 뛰어 볼 의향은 있으신지, 그리고 술도 안 드시면서 왜 배가 나오시는지…를 묻고 싶은데 이렇게 진짜 여쭤봤다간 경기 출전 안 시키시겠죠(웃음)?”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