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린 돈, 꼼짝 마’ 지난 17일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왼쪽)가 스위스계 율리우스 바에르 은행의 간부였던 루돌프 엘메르로부터 전달받은 CD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CD에는 2000명의 해외 고객 정보가 담겨 있다. |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산지에게 스위스 비밀 계좌 거래내역이 담긴 2개의 CD를 넘긴 인물은 스위스의 유명 프라이빗 뱅크(부자들의 자산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은행)인 ‘율리우스 바에르’에서 20년간 근무했던 전 직원 루돌프 엘메르다. 그는 조세피난처인 케이맨군도(세금이 거의 없어 말 그대로 유령회사를 설립한 뒤 탈세를 하는 데 이용되는 조세회피지역) 지점장을 8년간 맡은 바 있다. 엘메르는 CD에 지난 1990년부터 2009년까지 스위스의 3개 금융기관을 통해 거래한 자료가 들어있다고 밝혔다. 또한 2000명의 명단에는 다국적 기업과 헤지펀드, 고위층 인사는 물론 유력 정치인도 40여 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케이맨군도 탈세고객 명단이 공개될 경우 당사자들은 그간 탈루한 세금을 납부해야 함은 물론 엄청난 벌금을 부여받게 되며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 자명하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형사소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치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도 높다.
전 세계 유력인사 2000여 명의 비밀계좌 거래내역이 담긴 자료가 위키리크스에 넘겨짐에 따라 전 세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우리나라 유력 인사들이 명단에 포함돼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문제의 스위스 은행이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도 지점을 두고 있어 아시아 지역 갑부와 정치인 등이 맡긴 ‘검은돈’을 관리해 줬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인이 포함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그동안 전직 대통령들은 물론이고 그룹해체 전 천문학적인 돈을 빼돌린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을 받은 ‘회장님’ 등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운용했을 것이란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초읽기에 돌입한 스위스 비밀계좌명단에 국내 유력인사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공개될 거래내역 자료가 수집된 시기(1990년~2009년)가 국내에서 대형 비자금 사건이 잇따라 터진 시기라는 점에서 ‘한국인 포함’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스위스는 고객의 신분 및 자금의 성격을 불문하고 예치되는 돈에 대해 예금자의 신원을 철저히 보장하는 금융비밀주의를 표방해 왔다. 따라서 스위스는 국제 금융거래 시장의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으며 ‘검은돈 창고’라는 오명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실제로 국민의 혈세를 빼돌린 세계의 독재자들과 악질 정치인들은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스위스 은행을 자주 애용해 왔다. 고객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가 조합된 계좌번호만으로 비밀리에 계좌를 관리하고 있는 스위스 은행은 드러내기 곤란한 자금을 예치하고 세무당국의 눈을 피해 재산을 빼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잊힐 만하면 ‘◯◯◯ 비자금’이라는 미확인 소문과 함께 국내 정·재·관계 거물급 인사들의 스위스 비밀계좌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유력 정치인들과 권력 실세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스위스 은행을 이용해 검은 거래를 일삼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져 왔다. 일례로 이후락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경우 ‘스위스에 비밀계좌를 운용해 왔다’는 증언이 미국 청문회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 전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관리해 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78년 미국 하원국제관계소위원회가 펴낸 ‘한미관계 조사보고서’에는 “이후락이 자금을 모아 스위스 은행에 입금한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은행 계좌가 실제 있다는 것은 은행 기록, 이후락 아들 이동훈의 증언으로 입증됐다. 이동훈은 소위원회 조사관에게 스위스 은행에 있는 돈은 (아버지 돈이 아니라) 대통령을 위한 정부 자금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비자금 의혹에 시달렸다. 노 전 대통령의 딸 소영 씨는 미국에 달러를 밀반입한 혐의로 미 법정에 섰을 당시 스위스 비밀계좌가 문제 된 바 있다. 또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장인의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스위스 비밀계좌에 외화를 빼돌린 혐의로 1994년과 1995년 두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 받았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남긴 전두환 전 대통령도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으나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위스 계좌 운용설과 맞물려 곤욕을 치렀다. 박 전 대표가 부친이 사망한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스위스로 가 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60억 달러를 챙겼다는 것이 루머의 골자였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도 스위스 은행 비자금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정 전 회장과 그의 넷째 아들 한근 씨는 회삿돈 327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BBK 사건의 주역인 옵셔널벤쳐스코리아 전 대표 김경준 씨도 스위스 은행에 비밀계좌를 갖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 씨가 스위스의 한 은행에 1530만 달러를 예치한 사실이 FBI에 의해 확인되면서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실제로 당시 연방검찰이 제출한 보석불허 관련 자료에는 “김 씨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예금을 2003년 3월 12일부터 2004년 3월 1일까지 5차례에 걸쳐 크레딧 스위스 프라이빗 은행에 총 1530만 달러를 입금시킨 기록이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김 씨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예치시킨 이 돈의 성격에 대한 의혹이 무성히 나돌기도 했다.
‘박연차 게이트’의 주역이었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도 스위스 계좌에 비자금을 은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은 “박 전 회장이 2002년 설립한 페이퍼컴퍼니인 태광실업 홍콩 현지법인 APC의 UBS 스위스 계좌에서 태광실업의 미국 현지법인인 태광 아메리카의 한 계좌로 1200만 달러, APC의 HSBC 홍콩계좌에서 태광 아메리카의 또 다른 계좌로 2550만 달러가 각각 입금되는 등 2개 계좌에서 총 3750만 달러가 입금된 사실이 있다고 들었다”며 검찰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대우그룹 구명로비 대가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526억 원을 받은 무기거래상 조풍언 씨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스위스 비밀계좌 운용 의혹에 휘말린 바 있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 직전 검찰에서 권 전 고문 측의 해외계좌로 송금했다고 진술한 3000만 달러의 행방과 관련, 이 돈이 스위스 비밀 계좌로 유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 외에도 다수의 국내 기업들은 스위스 비밀계좌 거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70년대 초 중동 개발 붐 이후 기업들이 탈세와 돈세탁을 목적으로 스위스 은행을 이용해왔다는 의혹이 있었다. 특히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조성된 검은 정치자금이 스위스 비밀계좌로 대거 예치됐으며, 무기개발과 원자력 발전기 도입, 오일 사업에 뛰어든 기업들이 리베이트로 받은 검은돈도 스위스로 건너가 보관됐다는 루머도 무성했다.
2010년 5월 국세청은 조세피난처 등에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해외펀드를 가장해 기업자금을 불법 유출한 4개 기업과 사주를 6개월간 조사해 탈루소득 6224억 원을 찾아내기도 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국내 한 제조업체의 사주 A 씨는 역외에 설립한 현지법인과 페이퍼컴퍼니를 이용, 매출단가를 조작하거나 용역 대가를 허위지급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스위스 등 해외금융계좌에 숨긴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국민들이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한때 최고 권력을 누렸던 전직 대통령들과 퇴출된 기업 총수들이 빼돌린 막대한 자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 때문이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 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중요 추징금 미납자로 관리되고 있는 거물급 인사들이 재산을 은닉해뒀을 ‘창고’로 제일 먼저 추정되는 곳도 바로 스위스 은행이다. 국민들이 이번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주목하며 굳게 닫혀있던 스위스 은행의 빗장이 열리기를 염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김정일 돈, 아들에 넘겨주고 있다는데…
스위스 비밀계좌 공개가 임박함에 따라 김정일-정은 부자가 은닉해둔 비자금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스위스 은행의 ‘검은손’이라는 루머는 김일성의 비밀계좌설과 연결되어 있다. 지난 2002년 한 언론은 19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 명의로 스위스 최대 은행에 80억 달러 상당의 비밀계좌가 개설되어 있다고 보도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김 위원장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대해서는 2006년 미국 CIA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핵무기에 대한 압박카드로 북한 자금줄을 막을 수 있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CIA는 2000년 기준으로 43억 달러의 비자금이 예치돼 있다고 추정했는데 2007년 2월 김 위원장의 스위스 비밀계좌 존재 여부를 놓고 스위스와 미국이 열띤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김 위원장이 해외 은닉 비자금을 후계자인 정은에게 넘겨주는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지난해 3월 14일자 보도를 통해 “김 위원장이 핵무기, 미사일 기술 거래, 마약 밀매, 보험사기, 수용소의 강제노동, 외국 통화 위조 등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했고 과거 돈세탁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기 전까지는 대부분 스위스 은행에 보관하고 있다가 돈세탁으로 유명한 룩셈부르크로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스위스 비밀계좌에 예치되어 있는 김 위원장의 돈이 정은의 수중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진짜 권력승계가 시작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전체 비자금 규모 및 은닉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일부 외신들과 국내 대북 소식통들은 김 위원장이 40억~50억 달러 정도의 비자금을 조성해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나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처럼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등 유럽 은행 계좌에 은닉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