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IOC훈장을 전수받고 있다. 맨 오른쪽은 필자. |
김대중은 1971년 40대 기수론 속에 김영삼 의원과 겨루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일시에 국민적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 붙어 높은 목청으로 수십 만 관중을 사로잡는 등 선전을 했지만 패배했다. 그의 정치적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선거 후 일본, 미국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의 뉴재팬호텔에서 괴한에 납치됐다. 동해상에서 수장(水葬)을 당하기 직전이었는데 다행히도 마침 미국 비행기가 상공을 날아 죽음을 면했다. 이는 한국 정보기관의 일본주권 침해 등의 문제를 야기하며 당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때 일본정부와의 문제는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가서 해결하고 돌아왔다. 김대중은 곧 국내로 이송되었다. 이후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 주변에서 정보원들에게 연행되어 가는 것을 필자는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누가 시켰느냐가 모두에게 궁금한 일이었다. 윤필용 사건 때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했다는 말이 많이 돌았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보복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 취임식 전에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사면조치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부탁했고, 대통령 취임식에도 두 전직 대통령을 초대했다.
어쨌든 김대중은 1976년부터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1980년 초에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3김 회담이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김상만 회장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은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대중이 풀려난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온 것이기도 했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국회에서는 새로운 헌법개정작업(위원장 김택수)이 진행 중이었고, 신군부가 알게 모르게 정권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납치된 뒤 동해에 수장될 뻔했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 13일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81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독서를 하는 모습. |
김대중은 1985년에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추협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제5공화국에서 내세우는 군인 출신 대통령 후보에 대항하기 위해 야당후보 단일화를 모색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김영삼, 김대중은 각자 다른 길로 달렸다. 이때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야당표가 갈라져 패배하자 김영삼은 ‘천추의 한’이라고 했고, 김대중은 얼마 전 출간된 자서전에서 김영삼처럼 후회하면서 ‘자기라도 양보할 것을 그랬다’고 탄식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선언에 대한 야당의 반대운동(6월항쟁)이 심화되자 1987년 6월 노태우 후보의 발표로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었고, 노태우 후보에 대항해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각각 12월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차례로 2~4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한 것이었다. 이후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에서는 전국구로 당선됐다. 또한 1991년 3당 합당 후에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80년대 정계복귀는 88서울올림픽 준비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서울올림픽 준비가 막바지에 이를 때 그때까지 조용했던 서울올림픽에 대한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북한도 ‘서울올림픽의 반을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을 했다. 소련 등 공산권의 권유로 남북공동개최안이 제기됐고 4회에 걸친 남북공동개최가 논의되게 이르렀다. 이때 IOC헌장에는 공동개최는 없었고, IOC는 분산개최로 3~4개 종목을 주는 안을 가지고 교섭에 임했다.
정치적 경륜이 두터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야 3당 지도자의 영향력을 인식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정당을 만들어 당수를 지냈고, 독립자치주(카탈루냐)의 수장도 한 사람이다. 3당 중에 특히 김대중을 만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야 3당 당수를 만나기로 방침을 세우고 방한 때마다 필자에게 요청을 해왔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였던 만큼 사마란치의 요청은 국내 정치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계속 거절한 끝에 드디어 ‘예방은 안 되고 사마란치 초청의 식사 형식은 좋다’는 양해를 얻어내고 신라호텔에 조찬을 주선했다.
그런데 당시 여권이 민정당의 윤길중 대표도 포함시켜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래서 힘들게 윤 대표까지 포함해 주선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좌석문제가 터졌다. 민정당의 박준병 사무총장이 육사 12기 동기인 박세직 위원장에게 윤 대표를 여당이니 상석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박 위원장으로서는 해결방법이 없고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박준병 사무총장이 나에게 직접 요청전화도 걸어왔다. 사마란치에게 일단 상의를 했더니 ‘3야당은 총재고 윤 대표는 대표니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윤길중 순으로 앉아야지 무슨 소리냐’라고 했다. 이런 사마란치 의견을 민정당에 그대로 전했는데도 계속 압력이 들어왔다. 여당 체면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사마란치에게 사정을 했더니 사실은 김대중 총재를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구색을 갖추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정 그렇다면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하석에 자기가 앉겠다고 하며 간신히 수습이 됐다. 사마란치는 서울올림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남북회담, 소련 등 공산권국가 참가의 의의 등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에 3당 총재 내외를 귀빈(VIP)으로 초청했다. 이야기가 잘 진전되어 야당 총재들은 협조를 약속했고, 특히 김대중은 재야세력의 협조를 위해 계훈제 등을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필자가 계훈제에게 연락하여 신라호텔 사마란치 방에서 계훈제와 2~3명의 재야지도자를 만나게 했다. 신라호텔 앞 동국대학 등 서울시내 군데군데에서 시위가 있을 때다.
재야인사들과의 1차 회의가 끝난 후 김대중은 사마란치를 단 둘이서 따로 만났다. 이때 만남은 한국 탁구선수 안재형과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중국 탁구선수 자오즈민의 결혼 문제를 성사시키기 위한 사마란치의 지원 요청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공산국가인 중국의 선수와 한국 선수의 결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요청, 사마란치의 지원으로 허가되어 안재형과 자오즈민은 서울올림픽 후에 결혼했다. 결혼할 때는 박철언 체육장관이 신랑 신부를 많이 도와주었다. 이렇게 야당은 물론이고, 재야까지 직접 챙긴 이런 모임들이 결국 서울올림픽에 국민의 단결을 가져오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의 인연으로 인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사마란치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게 됐다. 1998년 2월, 나가노동계올림픽 직후였다. 사마란치가 외국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것은 남아공화국의 만델라와 한국의 김대중 두 번이 유일하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에게 다시 패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캠브리지대학에서 1년간 연구 활동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영국 및 미국 체류 연구 활동이 영어를 하게 만들어 그 후 드물게 미국 공식 방문 때 프레스 클럽에서 영어로 연설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대중은 하버드, 캠브리지 등에서 산 공부를 한 것이다.
김대중은 1994년에 귀국해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김대중 이사장은 아태재단 일을 보면서 당시 민주당이 최고 계파인 동교동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고 7월에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김대중 주변에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투옥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은 필자의 친우며 일본의 자민당 3역의 하나며 자치·우정대신인 후카야 다카시 의원이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 각료를 소개하면서 “반 이상이 형무소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1997년 김대중 총재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 낸 뒤 같은 해 12월에 제15대 대통령에 당선,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1998년 2월 취임 후 국무총리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지명하여 연립정권 정부가 시작됐다. 이때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충청도가 없었더라면 김대중의 당선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단일화 과정에서 내각책임제를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은 것과 임동원 통일장관해임거부 문제로 자민련과는 결별하게 된다. 결별직전에 청와대에서 민주당 의원들에게 찬반의견을 물었는데 결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거기서부터 여소야대의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연립체제 기간에 국무총리는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코 정치는 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필자도 정치에 끌려 들어가 혹독한 고난을 겪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