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스포츠에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IOC2000 트로피를 전달했다. |
개인적으로 4·19, 5·16을 겪으며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그동안 정치와는 담을 쌓았는데도 말이다. 발기인 명단이 나오고 얼마 안 돼 국회 문공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호되게 당했다. 심지어 박종웅 의원 같은 이는 국회의원하고 싶으면 한나라당에 이야기하지 그랬느냐는 말도 했다. 이에 발기인만 하고 국회에 안 들어가는 조건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내 이름이 들어간 비례대표명단이 신문에 나오기 시작했다. 김옥두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름을 빼달라고 했는데 “곤란하다”는 답이 나왔다. 청와대는 아예 연락이 안 됐다. 이렇게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돼 버렸다.
당시 발기인 25명이 청와대 만찬에 갔는데 이재정 의원이 “김 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라고 하니 김대중 대통령이 “밖에 나가면 나보다 더 유명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회장 잘 부탁드립니다”고 두 번이나 말을 해 사양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이 이 정도로 직접 부탁하면 ‘체육의 대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고 체육에 도움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후에 들은 바로는 필자가 미국 언론 등에서 자꾸 공격당하니 보호해줘야겠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생각했다고 한다.
2000년 봄 들어 남북문제가 대두하고 남북정상 회담 등이 거론됐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 IOC 집행위원회에서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 남북한이 동시 입장할 것을 사마란치에 제의했더니 평화를 추구하는 IOC 입장에서는 대찬성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얻고 추진하기로 했다. 6월 13~15일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정몽준, 정몽헌, 이해찬, 이완구, 구범모(LG), 손병두, 손길승, 장상, 문정인 교수 등과 가게 되었다. 동시입장에 대해 북한에서 아무 답이 없고 하여 가서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 가서 장웅 IOC 위원도 만나고 각계 지도자들도 거의 다 만났다.
방북기간 중 김대중 대통령은 필자의 얼굴만 보면 “어떻게 되었어?” 하고 물어봤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필자한테 웃으면서 “체육회장 오셨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무엇을 해드리면 될까요?”라고 묻기에 이때다 싶어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동시입장을 제안해 놓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은 그 문제는 무시하고 “그것 말고 남북이 합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종목이 무엇이 있어요?”라고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탁구입니다” 했더니 김 위원장은 한참을 생각했다. 이렇게 동시입장 문제는 진전 없이 돌아왔고 사마란치를 시켜 남북 두 정상들에게 시드니 개회식 참관을 바라는 초청장을 보내게 했다. 사마란치는 회신은 안 오겠지만 해보겠다 해서 IOC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에게 초청서한을 정중히 보냈다. 예상대로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TV에 김정일 위원장이 “국사로 바쁜데 내가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 가서 영화배우 노릇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50년 만에 세계가 보는 앞에서 남북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올림픽개회식은 30억 명이 TV로 보는 행사다.
그러나 시드니 IOC총회 직전에 장웅 IOC 위원이 도착했고, 본격적인 교섭이 사마란치, 필자, 장웅 간에 시작됐다. 평양과 몇 번 연락한 끝에 기는 반도기, 유니폼은 남북이 동일한 것(단 남쪽이 제공), 국호는 KOREA, 입장선수 수는 90명씩 180명(북한선수단은 총 65명밖에 안되어 임원 20명이 IOC 여비로 평양에서 급히 초청), 경기 때는 각자 국기를 게양하며 각자 팀으로 참가하는 조건으로 성사시켰다. 교섭 진행은 박지원 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기간 중 교섭이 잘 안 되자 서울에서는 ‘집어치우라’는 소리도 들렸지만 결국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는 초청받은 각국 국가원수들과 사마란치, 그리고 10만 관중 전원이 기립하는 가운데 남북이 하나가 되어 입장했다. 상징적으로 또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나와 장웅 IOC 위원도 같이 행진했다.
▲ <왼쪽>김대중 대통령이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오른쪽>2000년 시드니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다. |
어쨌든 시드니 이후 부산아시안게임, 대구유니버시아드게임에도 북한이 참가하고 교류가 이어졌다. 그런데 베이징올림픽 때는 50년 만에 이룩한 동시입장이나 상호 응원은 없어지고 서로 말도 안 하는 처지가 되었다.
6·15 선언 때는 낮은 단계의 연합체에서 완전한 통일로 가는 안, 즉 ‘햇볕정책’이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주 수첩을 꺼내 몇 월까지 열차가 남북을 가로질러 시베리아로 한 줄, 또 한 줄은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바로 갈 수 있어 경제적으로 굉장한 물자가 이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들으면서도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상당한 이상론자로 느껴졌다. 확실히 통일과 평화 번영의 이상론자였던 것 같다. 서구에서는 만델라와 많이 비교되었는데 이상론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햇볕정책을 미국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게 설명했더니 ‘김정일이 정말 개방하겠느냐? 개방하면 무너질 텐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혹 김대중 대통령을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런 거 같지는 않았다. 주변에도 보수가 포진되어 있다. 그 다음 정권에는 좌경이 많았던 것 같다. 다만 영어로 ‘open to left’ 즉 미국식 자유주의(Liberal) 쪽으로 생각된다. 외교정책도 미국과의 동맹을 주축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와 선린을 유지한다는 4강 외교를 기본으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탔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남북은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휴전선의 철책을 사이에 놓고 불신과 증오로 50년을 살아왔다”면서 “민족의 안전과 화해협력을 염원하며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했다”고 자랑했다. 그것이 불과 10년 전이다.
2001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서 독대를 하게 됐다. 갔더니 부산아시아게임에 북한도 안 올 것이고 월드컵축구에 눌려서 어려울 것이니 조직위원장을 그만두고, 대한체육회장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필자는 “부산아시아게임은 5년이나 준비했으니 그만두어도 돌아갈 것이지만, 대한체육회장은 곧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이 있으니 그만두면 무너질 겁니다. 그만두는 시기는 저에게 맡기십시오” 하고 나왔다.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격려는 못할망정 사퇴를 종용받으니 기분은 아주 나빴지만 아무에게도 이유는 밝힐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부산아시아게임 조직위원장은 그 다음날 사퇴했다. 그 바람에 이유를 모르는 부산에서는 ‘죽일 놈’이 됐다. 얼마 전에 허남식 부산시장도 그 말을 듣더니 “그런 줄 몰랐습니다”라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을 독대한 며칠 후 한광옥 비서실장이 “그만두는 날짜를 언론에 밝히시지오”라고 전화가 왔기에 “언론에 미리 밝히면 ‘레임덕’이 되니 그만두는 타이밍은 나에게 일임하시오” 하고 끊었다.
솔트레이크 올림픽 때 김동성 사건이 터지고 마치 내가 잘못한 것처럼 MBC가 앞장서서 매도했다. 그 문제는 곧 가라앉았지만 대통령께 약속한 것이니 그것과는 별개로 임기를 3년 남기고 김정행 부회장을 직무대행으로 임명하고 체육회장직을 사퇴했다. 복귀 운동이 각 경기단체 간에 3개월 동안이나 일어났지만 사퇴를 고수했다.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다. 동교동에 작별인사를 하러 간 것이 마지막 대면이었다.
최근에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있어 갔었다. 책의 내용은 민주주의가 흐트러지고 군사독재가 되살아나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부자만 위하는 정권, 권력의 만능의식을 통탄했고, 이 나라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라며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는다고 검찰의 자성과 변화를 촉구했다. 또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제도 나쁘지 않다며 1987년 대선 때 YS와 단일화 못해 국민에게 미안하고 자기라도 양보했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에 대해 딸로서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마웠다. 구원을 받은 것 같다”고 술회했다. 모두 김대중 대통령의 경륜과 인격이 배어 있는 말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체육에 눈을 돌린 것은 1998년 제주 전국체전 때였던 것 같다. 국가의 힘에 체육이 기여하는 강도를 느낀 것 같다. 태릉선수촌에도 오고 올림픽선수단은 꼭 청와대로 불러 소연을 열고 격려해 주었다. IOC총회 개막식, 용평동계아시안게임 개회식, 매년 있는 전국체전개회식에도 꼭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고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상암경기장을 비롯하여 경기장을 전국에 짓게 하였고,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에도 가서 참관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평화통일을 꿈꾸면서 민주화 운동에 온 몸을 바친 김대중 15대 대통령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그리고 체육계에서도 오랫동안 존경받고 기억될 거인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