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여배우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아파트 광고. 고소영, 고현정, 김남주, 이영애, 김태희에 이르기까지 아파트 광고 모델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야만 대형건설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자리에 붙은 명예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아파트 광고 한 번 찍으면 아파트 한 채가 떨어진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생겼을 정도다. 스타의 광고 가치에 따라 계약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아파트 광고 계약금은 6억~7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불문율이 깨지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형건설사들이 아파트 광고계에서 톱스타들을 내세운 광고를 점점 꺼리고 있는 것이다. 광고계의 여왕자리로 군림했던 아파트 광고가 더 이상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없는 진짜 속사정은 무엇일까.
백화점 쇼핑백을 두 손 가득 들고 밤이 돼 집에 돌아왔다. 이어지는 남편의 화려한 이벤트. 냉장고를 둘러싼 수백 개의 초와 함께 장미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다. 그순간 저녁 파티 약속이 생각난다. 이브닝드레스를 챙겨 입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이영애가 출연했던 아파트 ‘자이’ 광고의 한 장면이다. 여성들이 한 번씩 꿈꿀 법한 삶을 여배우의 생활에 대입시킨 후 그 배경으로 아파트 내부와 외부의 모습을 자연스레 노출시키는 콘셉트다. 광고 말미엔 ‘남들에겐 꿈이지만 자이에겐 생활입니다’라는 카피문구를 넣음으로서 아파트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 GS건설은 지난 8년 동안 이영애를 모델로 내세워 이러한 드라마적인 요소를 아파트 홍보에 적절히 활용해왔다.
그런데 1월경 GS건설이 돌연 이영애와 재계약하지 않고 무명에 가까운 패션모델 양윤영과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업계에 잔잔한 충격파를 던졌다. GS건설은 다른 건설사들이 광고비용을 줄이기 위해 모델을 일반인으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했을 때도 광고 집행 횟수는 줄일지언정 ‘자이=이영애’의 공식을 꾸준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GS건설과 이영애의 8년 만의 결별은 뜨거운 관심과 함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놨다.
GS건설 측은 이영애와 계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새로운 모델 발탁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전환할 시기가 왔다는 입장을 들었다. GS건설 한 관계자는 “그동안 이영애 씨와 우리 브랜드의 고급스런 분위기가 잘 맞았는데 시장 환경이 변했다”며 “이제 꼭 유명인을 통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것”이라고 광고 모델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광고업계 내에서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광고업계 내 매출규모로 2순위에 해당하는 이노션 관계자는 “아파트 광고에 등장한 여배우들은 이후 활동이 뜸해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경우 배우의 이미지가 아파트 이미지와 맞물려 상승효과를 내기보다 오히려 여배우가 아파트 브랜드 이미지에 기대어 인지도를 유지하는 등 기대만큼의 광고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는 회의감이 커진 영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건설경기 악화와 주택난으로 대중의 심리가 바뀌었다는 시각도 있다. 매출규모 5위에 해당하는 대홍기획 관계자는 “주택경기가 악화된 상황에서 낙원에 사는 듯한 여배우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아파트를 홍보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실제로 최근 ‘자이’ 광고에서는 휴대폰 내 원격조정장치가 있어 외출 중에도 아파트 내 가스불이나 전기 장치 등을 끌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이 구축됐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바 있다. 광고 역시 기존의 콘셉트에 부합되게 고급스럽게 꾸며졌다. ‘자이’에 사는 이영애는 친정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순간 어머니가 가스불을 켜고 나왔다며 걱정스레 딸을 바라봤다. 이영애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 후 휴대폰을 켜 버튼을 하나 눌렀다. 바로 다음 컷에서 집 부엌이 비춰지며 가스불이 꺼지고 이영애가 환하게 웃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각색한 패러디물이 한 네티즌에 의해 제작돼 화제가 됐다. 이영애가 웃으며 휴대폰에 버튼 하나를 누르는 순간 아파트 전체가 폭파되고 화염에 뒤덮이는 장면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후 환하게 웃는 이영애의 모습과 ‘자이’ 로고가 함께 등장했다. 이 패러디물이 즉각적인 손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지난 8년 동안 고수해 온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톱스타를 광고판에서 내리고 있는 것은 GS건설만은 아니다. 아파트건설업계 최초로 ‘e-편한세상’이라는 브랜드를 도입한 대림산업은 초기엔 채시라를 모델로 광고를 진행해오다 현재는 일반인을 모델로 광고를 진행하고 있다. 광고 내용 역시 고급스런 생활상보다는 일반 가정의 편안하고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콘셉트를 바꿨다.
고소영을 광고모델로 외국의 궁전에 온 듯한 모습으로 아파트를 홍보했던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 역시 2년 전부터 전략을 바꿨다. ‘힐스테이트’에서 생활하는 가정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며 누구나 살고 싶은 친근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전해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건설업계가 이러한 변화를 모두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우건설은 ‘푸르지오’ 광고모델로 김남주를 내세워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후 현재는 김태희를 내세우고 있다. 대형스타를 내세운 아파트 광고의 오랜 관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김태희가 1월 말 계약이 종료돼 다음 모델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우건설 측은 아직 향후 광고 콘셉트 및 재계약 여부에 대해선 공식화하기 이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삼성물산 역시 ‘래미안’ 초기 광고모델로 드라마 <인어아가씨>를 계기로 스타덤에 오른 장서희를 내세워 톡톡한 홍보 효과를 봤다. 현재는 이미숙과 신민아를 동시에 계약해 ‘여배우들이 직접 살아 보고 결정한 명품 아파트’라는 콘셉트로 다큐멘터리형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