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신세계 강남점 오픈 행사 장면. 왼쪽 위는 이명희 신세계 회장. | ||
그동안 이들 여걸 3인방은 동업계에서 묘한 라이벌관계를 유지해왔다. 나이는 신영자 부사장이 올해 63세로 가장 많고, 이명희 회장은 신 부사장보다 한 살 아래이며, 우 고문은 이 회장보다 여덟 살 밑이다.
이들 중 업계 1, 2위를 다투는 이 회장과 신 부사장은 좀더 특수한 라이벌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이 회장은 한 번도 업계에서 신 부사장을 꺾지 못했다. 롯데백화점의 파워가 항상 신세계를 앞서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마트라는 할인점시장에서 신세계가 롯데를 제압하곤 있지만, 한국 최고를 지향해온 삼성가가 뿌리인 이명희 회장으로선 자존심이 구겨져 왔었다.
'30년 숙원.’
드디어 이명희 회장이 ‘백화점 석권’의 야심을 본격 드러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롯데를 겨냥, 백화점시장을 장악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이 말은 단순히 ‘잘 하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롯데를 겨냥한 ‘선전포고’라는 점에서 적잖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2005년 신세계 충무로 본점 재건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백화점 영업에 나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다. 이 발표는 신세계가 백화점 부문을 주력사업에서 일단 제쳐둔 지 30년여 만에 입장을 바꾼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신세계는 롯데, 현대 등 경쟁사들과 비교해볼 때 유통업체 중 백화점 부문은 다소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신세계는 백화점보다는 할인점 ‘이마트’, 조선호텔 등 다른 분야에 열을 올려왔다.
지난 97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스타벅스를 들여와 (주)스타벅스커피코리아를 세울 정도로 백화점과는 거리를 둬왔다. 이런 상황에서 신세계가 본격적인 ‘백화점 영업’을 표방하고 나서자 업계의 관심이 대단하다.
신세계 관계자들도 무척 고무된 분위기다. 신세계 관계자는 “30년여 동안 백화점 본점이 위치한 곳을 보면 숙제를 풀지 못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며 “오랜 숙원 사업을 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신세계의 백화점 스토리를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신세계의 역사는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전신은 미스코시 경성지점으로 지난 30년 10월에 개점했다. 이후 55년 신세계는 동화백화점을 설립했고, 63년 상호를 신세계백화점으로 변경했다. 시작부터 따지자면 7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 최강자로 꼽히는 롯데가 국내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79년이니, 신세계는 무려 49년이나 먼저 백화점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신세계가 단순히 롯데, 현대 등 타사보다 연혁만 앞선 것은 아니었다. 신세계는 사업 내용에 있어서도 국내 유통업계를 선도하는 대표격이었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모두 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신세계백화점이 해외브랜드 유치, 호텔 등을 인수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이, 최대 숙적인 롯데그룹이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것이다.
롯데그룹이 국내에서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키로 한 것은 신세계보다 한참 늦은 70년대 중반이었다. 롯데는 76년 쇼핑사업본부를 발족해, 3년이 지난 1979년 롯데쇼핑(주)를 설립했다. 같은 해 12월 롯데 소공동 본점을 오픈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세계와 경쟁체제에 들어간 것. 롯데는 일본 최대의 백화점인 다카시마 등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 시장에서 영업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즈음 당시 백화점 절대 강자였던 신세계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모그룹인 삼성그룹으로부터의 독립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지난 91년 고 이병철 회장의 5녀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삼성으로부터 그룹을 분리, 독립경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명희 회장이 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난 뒤, 실질적으로 그룹이 분리되기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사실상 이 때부터 신세계는 삼성과 별개로 경영이 이뤄진다.
신세계와 롯데의 ‘백화점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 신세계는 지난 93년 국내 최초로 할인점 업체인 ‘이마트’를 오픈하면서 할인점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롯데는 지난 88년 소공동 본점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같은 해 연말에는 강남 잠실점을 오픈했다.
신세계가 할인점 시장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롯데는 지난 94년 유통업 사상 최초로 ‘백화점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런 현상은 10년이 넘게 지속됐다. 신세계는 할인점을 주력으로 백화점 본점을 방치했고, 롯데는 백화점을 주력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간 것.
신세계가 ‘방치’하다시피 했던 백화점 강화를 선언하고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하나는 할인점 매출 포화 상태에 따른 돌파구 마련 차원.
신세계 관계자는 “올해 할인점 수익성이 최대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며 “할인점이 향후 몇 년 동안은 안정적 추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 내년부터 백화점 영업을 강화키로 했다”고 밝혔다.
신세계가 2005년을 콕 찍은 또 다른 이유는 신세계 강남점의 성공적 런칭에 따른 자신감 회복. 신세계는 지난 2000년 10월 강남점을 오픈한 이후, 성공적이었다는 업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신세계 강남점은 요즘과 같은 불경기 속에서 전국 86개의 백화점 중에서 유일하게 매출이 매해 상승하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는 7천억원.
이명희 회장 역시 신세계 강남점이 명품과 대중성을 골고루 갖춘 백화점으로 매출이 연일 상승하고 있어 흐뭇해했다는 후문이다. 신세계로서는 이 같은 강남점의 성공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
신세계의 공격적 경영에 롯데도 곧장 반격에 나섬에 따라 오는 2005년 서울 유통 1번지에서의 접전은 더욱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