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딜러들 사이에서는 한숨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장중 원·달러 환율이 1천47.2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환율이 1천50원대 밑으로 빠진 것은 IMF 사태가 있기 직전인 지난 97년 이후 7년 만의 일이었다.
원달러 환율이 반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매일 최저점을 갱신하고 있다. 불과 반 년전인 지난 5월 원달러 환율은 1천2백원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환율은 추측이 가능한 선에서 소폭 상승-하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지난 11월 중반 환율이 하루 10~20원 이상 빠지기 시작하더니 가파른 속도로 하락곡선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경우, 수출,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까지도 환율이 더 떨어질 여력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달러를 쳐달라(환딜러들이 사용하는 팔아달라는 뜻의 은어)는 주문이 대부분”이라며 “이 같은 추세라면 환율이 더 빠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몇몇 기업에서는 벌써부터 원달러 환율이 1천원대가 될 경우를 대비해 작전 시뮬레이션을 짜놨다는 얘기마저 솔솔 나오고 있다. 하지만 환율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에 비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개인이 뛰어들기 어려운 시장이기 때문이다.
대체 환 시장은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들이 움직일까.
원·달러, 원·엔, 원·위안화 등 환율이 결정되는 원리를 간단하다.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는 두 나라의 화폐를 적정한 비율로 교환하면 된다.
쉽게 말해 국내 원화에 비해 달러를 사고자하는 사람이 많으면 달러값은 올라가게 되고, 반대로 달러를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원화 가격이 올라 상대적으로 달러값이 떨어진다.
환율 시장의 거래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하루에 환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규모는 약 50억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6조원.
환율은 사자(Buy)와 팔자(Sell)가 동시에 움직이는 시장이므로, 각각 6조원이라고 가정하면 총 12조원이다.
증권시장에서 하룻동안 거래되는 금액은 거래소 2조~2조5천억원, 코스닥 4천5백억~5천억원 정도다. 환시장의 거래량은 증권가의 4~5배나 된다.
국내에서 환딜링을 하고 있는 곳은 60여 군데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상 딜링 업무를 하는 곳은 20군데 정도. 거래 규모가 가장 큰 곳은 국내 시중은행 5곳이다.
▲ 국내에서 대규모 딜링업무를 하는 곳은 시중은행들이다. 사진은 시중은행 외환딜러의 모습. | ||
이들이 달러를 사고파는 업무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수료의 퍼센트는 지극히 적다.
외국계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0.01~0.03%선이라고 한다. 1억원을 거래하면 1만원~3만원이다. 하지만 하루 거래량이 각각 6조원씩 12조원이라고 계산하면, 하루 거래 수수료는 10억~20억원. 한 달이면 수백억원대가 고스란히 은행 수입으로 떨어진다.
현재 국내 환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큰손은 누구일까.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개인이 달러를 사고 파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내 대기업이나 외국계 펀드가 주요 고객”이라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 등 개인 성향에 따라 달러를 사고파는 개인고객도 있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국내 환시장을 주무르는 큰손은 대기업-중소기업-외국계펀드-개인의 순이다. 가장 큰손으로 꼽히는 대기업의 경우, 수출 또는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빅5로는 내수와 수출 중 수출의 비중이 큰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이 꼽힌다.
보통 수출은 적게는 3개월~6개월 전에 실현된 것이어서 실제 대금이 오가는 시점에서의 환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수입 비중이 높은 SK, LG정유 등도 환시장의 큰손이다. 정부 부처도 환시장에서는 대표적인 큰손으로 꼽힌다. 국방부, 조달청, 수자원공사 등이 바로 그곳. 국방부의 경우, 비행기를 구입하는 비용이 대당 6천만달러 정도로 비용 지출이 많다보니 달러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원화에 비해 달러값이 떨어지고 있을 때 눈에 띄는 특징은 외국계 투기펀드의 비중이 는다는 점이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환시장에서 외국계 펀드의 주문이 늘었다”며 “이들은 한꺼번에 대량의 물량을 내놓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가격이 10~30원 이상씩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보통 외국계 다국적 펀드의 경우 펀드 자체의 규모가 수조원대에 이르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 이 중 일부만 풀려도 그 파워가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달러를 사겠다는 사람이 전혀 없을 때에는 더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요즘은 달러 팔자 1천만불보다 사자 1백만불이 훨씬 더 힘있게 느껴진다”며 “달러를 사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해석해보면 아직까지 대기업 및 외국계 펀드들은 원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더 낮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원달러 비율이 1천원대로 떨어져 수출에 주력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들의 어려움이 당분간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