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 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박철언 전 장관.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역대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 과정에는 집권 당시 최측근들과 참모들이 참여한다.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 과정에도 6공화국 시절 황태자로 통했던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장관은 2005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란 회고록을 통해 ‘3김 시대’의 민감한 정치 비사를 세밀하게 밝혀 파장을 몰고 온 바 있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및 비자금 문제를 기술할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박 전 장관을 3월 2일 역삼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서전 집필 과정에 참여한 사연을 묻자 박 전 장관은 6공화국 시절 황태자로 불리며 최측근으로 활동했다고 말한 뒤 당시의 기록과 사실들을 생생히 증언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회고록은 이미 수 년 전에 완성됐고, 인쇄만 하면 되는 상태지만 그 안에 몇 가지 내용 때문에 (참모들 간에) 이견을 좁히기 힘들어 출간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민감한 정치 비사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더라. 특히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 두 정권에 걸쳐 참모역할을 했던 인사들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 전 장관에 따르면 대립되고 있는 부분은 1990년 3당 합당 당시 노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얼마의 돈을 건넸는지와 이전 책에서는 밝혀지지 않은 ‘+알파’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모셨던 참모들 대부분이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에도 자리를 누렸는데 그 일과 관련 자신들을 변호하는 내용이 많이 발견됐다”면서 “그 부분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개진했다”고 말했다.
3당 합당 당시 건넨 비자금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언급할 것인지 아니면 그 부분을 빼고 출간할 것인지 참모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 전 장관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당시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를 통해 얼마의 돈을 건넸는지까지 모두 메모지에 기록해뒀다”며 당시 상황에 대한 모든 증언이 책에 게재되더라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그 돈이 1000억 원에 달한다는 소문에 대해선 “합당 당시 건넨 돈은 이전 책에서 밝혔듯 40억 정도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대선 준비 당시 물질적인 지원이 있었던 부분인데, 노 전 대통령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은 맞지만 아직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결정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악화 역시 출간 시기를 늦추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6월 전립선 암 수술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전립선의 괄약근을 잘라내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말까지 어눌해져 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감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면 역대 대통령의 회고록이 아닌 자칫 일부분만이 부각된 ‘제2의 폭로’로 변질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자는 의견이 출간 시기를 늦추게 된 또 다른 요인이라고 박 전 장관은 전했다.
다만 박 전 장관은 “개인적으로 누구나 아는 사실을 다시금 미화시켜 책을 출간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아픈 역사도 자랑스런 역사도 모두 우리의 역사이기에 당시의 잘잘못들은 있는 그대로 기술해 후대에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의 입장은 어떨까. 박 전 장관은 “사실상 지난 역사를 뒤돌아 봤을 때 대선 준비 당시 안팎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했던 노 전 대통령을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한 뒤 배신한 것이지 않나. 과거야 어찌됐든 노 전 대통령이 장기간 병석에 있으신데도 김 전 대통령은 단 한번도 문안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며 “그래도 노 전 대통령은 여전히 김 전 대통령에게 미칠 영향력을 헤아리고 있다. 때문에 민감한 부분에 대한 수위조절에 있어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북방밀사 시절 비사도 책으로
10년 전 정치활동을 끝내고 민간 변호사로 돌아간 박 전 장관. 그는 아직도 품 안에 조그마한 메모 수첩을 넣고 다니며 몇 일, 몇 시, 몇 분, 동석한 사람, 나눈 대화까지 하루의 일과를 세밀하게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이렇게 기록한 메모만도 120권에 달하고, 복사본까지 만들 정도로 보관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메모장이지만 그 안에는 그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1980년을 시작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아직 세간에 밝히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상당수다. 이 중 일부를 책으로 엮어 지인들에게 건넨 일도 있다. 그중 북방정책 입안자로 40여 차례 북측 대표단과 비밀 회담을 했을 당시, 이른바 북방밀사 시절의 비화들도 3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박 전 장관은 “한 권당 500페이지가량의 책 3권을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통일부 장관, 외무장관, 안기부장, 안기부 특별보좌관에게 개인적으로 나눠준 후 나머지 책은 국정원에 비밀문서로 분류해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에는 그의 메모를 토대로 당시 북측과 주고받은 대화, 장소, 건넨 선물, 세밀한 반응까지 기록돼 있다.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6년 전 출간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역시 동일한 의지와 근거로 엮은 책이었다. 역대 대통령, CEO, 국내외 실무진까지 1000명 이상의 이름이 거론됐고 그들과 주고받은 대화, 건넨 선물, 어떤 인물에 대해선 사례비로 건네진 금품의 액수까지 낱낱이 기술했다. 후폭풍도 대단했다. 그는 “법적 소송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출간한 책이었지만 단 한 명도 책 내용에 적힌 것에 대해 허위사실임을 주장해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며 비사들을 증언하는 일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의 책이 ‘폭로’나 ‘편파적 비방’으로 왜곡되자 스스로 대외적인 활동을 삼가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객관적 기록들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