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바둑>이 다시 한국기원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1년여 만의 귀향이다. 귀향이라니? <월간 바둑>이 어디 다른 곳에 팔리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그건 아니다. 한국기원이 재정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잠시 한국기원의 자회사격인 인터넷 바둑 사이트 ‘사이버오로’에 위탁을 했다가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바둑도 인터넷 시대. 오프라인의 활자 매체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시대가 이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절반은 체념할 수밖에. <월간 바둑>도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고, 한국기원과 사이버오로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편집-취재진들도 자주 바뀌었다. 바둑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분량도 300페이지가 넘는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이며, 그나마 제 집을 찾아온 것이 다행이다. 어려운 중에도 면모를 일신해, 40여 년 동안 고수하던 국판에서 4-6배판으로 생김새가 시원해졌다. 진즉 그래야 했다. 어쨌거나 살림이 축소되고 찾는 손길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바둑 동네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월간 바둑>은 1967년 8월호가 창간호. 올해 마흔네 살이 되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40년 이상 된 잡지를 찾아보기란 만만치 않다. <월간 바둑>을 발간하는 한국기원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힘이 없다. 그런데도 오직 바둑 동호인들만을 의지한 채 40여 년을 꿋꿋이 버텨온 것이다.
연륜도 연륜이거니와 그 오랜 세월 한 번도 결권이나 합병호 같은 게 없었다는 것, 격동의 세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런저런 잡지들이 명멸했던 것을 생각하면, 시사종합잡지도 아니고 레저 전문잡지로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고, 우리나라 잡지 풍토에서는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월간 바둑>은 한국 바둑의 중흥기인 이른바 ‘관철동 시대’의 증인이다. <월간 바둑> 창간 1년 후인 1968년 여름, 관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이 세워졌다. 해방 후부터 20여 년 동안 셋방을 전전하던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은 마침내 내 집이 생기는 날, 서럽고 고마워 울었다. 그때는 이미 시대가 바뀌어 조남철이 아니라 김인의 전성기였다. 한국기원은 관철동에서 26년을 살고 1994년 가을에 왕십리 홍익동, 지금 건물로 이사를 왔다.
창간과 한국기원 회관 준공 후, 몇 년 있다가 김인의 뒤를 이어 서봉수와 조훈현이 나타났고, 두 사람이 80년대 중반까지 처절하게 격돌하고 그들의 싸움이 하도 지독해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그 와중에 유창혁, 이창호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조-서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고는 곧장 세계제패를 이루었다. 관철동 시대는 거기까지. 이세돌이 입단한 것은 홍익동 시대가 막을 올린 1995년이었다.
지금은 바둑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관철동 시대, 홍익동 시대라고 말들을 하지만, 사실은, ‘관철동 시대’는 저작권자가 있다. 관철동 한국기원 3층 일반회원실에 출근 도장을 찍던 소설가 강홍규가 1980년대 중반 경향신문에 한 주에 한두 번, 한 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꽤 많은 분량으로 관철동과 길 건너 인사동에서 매일 만나 떠들고 술 마시던 문인 예술가들의 기행과 뒷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칼럼의 제목이 ‘관철동 시대’였다. 강홍규는 연재가 끝나고 얼마 후 1989년 채 쉰이 안 된 나이로 아깝게 타계했다.
당시 관철동과 인사동에는, 인사동은 지금도 그렇지만, 문인 예술가들이 모이는 동네였다. 한국전쟁 후부터 60년대까지 문인 예술가들이 애환을 나누었던 이른바 ‘명동 시대’가 장소를 옮긴 것이었다. 그들의 사랑방 연락처 아지트가 한국기원 3층에 있던 일반회원실이었다. 신경림 황명걸 신동문 박재삼 천상병 강홍규 등은 개근생이었고, 일반회원실에 들락거리다 보면 이병주 이근배 구중서 천승세 송영 이진섭 박수동 강철수 등도 눈에 띄곤 했다. 그리고 바둑은 거의 두지 않고 늘 양지 바른 창가에 기댄 채 조는 것 같았던, 관철동 디오게네스 민병산이 있었다. 벼락 치는 신경림의 속기는 언제나 유쾌했고, 색깔이 들어가 있는 뿔테 안경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이병주는 멋쟁이면서도, “사자와 같은 왕자의 풍도”가 있었다. 이들이 또 모두 <월간 바둑>의 고마운 필자였다.
‘관철동 시대’라는 말은, 원래는 ‘마지막 낭만의 시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대부분 바둑꾼이었기에 바둑 동네 사람들이 묵시적 기득권을 공감하게 되었던 것일 텐데, 이제는 한국 바둑의 한 시대를 지칭하는 ‘역사적 술어’로 굳어졌다.
1970년대 <월간 바둑>은 세상과 불화한 자들이 잠시 쉬었다가는 곳이기도 했다. 해직 언론인 성유보 심재택, 소설가 송기원 김성동 이인환 같은 사람들이, 길지는 않았지만 <월간 바둑>의 편집장이거나 기자였다.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붙잡고 면벽수도하던 김성동은 어느 날 산을 내려와 승복 차림으로 <월간 바둑> 편집기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1년 채 안 되게 일하다가 사표 내고 나가 소설 <만다라>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독자들 중에는 <월간 바둑>의 하이라이트는 편집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잡지는 대부분 그냥 ‘편집후기’지만, ‘월간 바둑’의 편집후기는 ‘공배를 메우면서’라는 꼭지 제목이 있다. 공배를 메우면서? 편집후기의 제목으로는 압권이라는 것이다. 바둑사 연구가이자 뛰어난 바둑 사료 수집가인 안영이 선생의 작품이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월간 바둑> 기자들이 신경림 시인과 어울리는 자리였다.
“선생님, 우리도 문단에 데뷔 좀 시켜 주세요.”
“좋지. 작품 갖고 와 봐.”
“에이, 우리가 무슨 작품이 있어요. 그냥 선생님 빽으로 좀 안 되나요?”
“…작품…왜 없어? 편집후기 있잖아. 그거라도 모아서 갖고 와.”
“아니, 편집후기로 어떻게 문인이 됩니까? 문인협회에도 무슨 분과라는 게 있잖아요. 소설분과, 시인분과 하는 식으로.”
“그래. 잘 아네. 그러면 후기분과라고 하나 새로 만들지, 뭐.”
민병산 신동문 이병주 박재삼 선생 등은 돌아가셨고, 신경림 선생은 요즘도 가끔 활동하시는 소식이 들린다. 그나저나 홍익동 한국기원에는 일반회원실이 없다. 치명적 약점이다. 일반회원실이 없으면 <월간 바둑>도 재미있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