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국 씨는 인터뷰 시작부터 지난 30년간의 설움이 벅찼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일요신문>은 속초에 있는 이 씨의 자택을 찾아가 그동안 겪었던 기나긴 고초의 세월과 무죄 확정의 심경을 자세히 들어봤다.
지난 6월 8일 기자가 동해바다가 훤히 보이는 속초 끝자락 한 마을을 찾았을 때, 까무잡잡한 한 바다 사나이는 반갑게도 연신 손을 흔들어 줬다. 그는 다름 아닌 지난 6월 3일 30년 만에 간첩혐의를 벗은 이성국 씨(57)였다. 이 씨는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거동 속에 남루한 자택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리고 인터뷰 처음부터 그는 설움이 벅찼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며칠 전, 서울고법 재심서 무죄가 확정됐을 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생각하기도 힘든 고문의 기억, 사회적 불이익, 가족들이 받은 설움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법정에서 가족들과 다 같이 눈물을 쏟았다.”
이 씨는 1971년 10월, 울릉도 조업을 마치고 뭍으로 귀항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그는 다행히 약 1년 만에 운 좋게도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동안 견디기 어려운 고초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17세에 불과했다.
“당시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선장의 실수로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결국 어선의 기관장이었던 나의 외조부님(고 강경하 씨)과 함께 납북됐다. 1년 간 북에 있을 때는 정말 살려고, 꼭 집에 돌아가려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1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고문과 감시가 시작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외조부와 함께 사법당국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그때 그들과 함께 귀국한 100여 명의 다른 어민들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은 그가 앞으로 겪을 고초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 씨는 귀환 후 사법당국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은 물론 기본적인 사회생활조차 꿈도 못 꿨다. 그리고 1981년 그에게는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 사법당국이 그를 먹잇감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1981년 3월께 나와 외조부님은 사법당국에 의해 불법 구금됐다. 북과 접촉할 목적으로 국내 군사기밀을 빼돌렸고 북괴를 찬양했으며 북으로 넘어가려한다는 허무맹랑한 이유에서였다. 당시 한창이던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외조부님은 114일 동안 잡혀계셨고, 나는 86일 동안 잡혀있었다. 불법구금 기간 동안 우리는 대전 대공 분실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는 공안정국 속에서 갖가지 간첩조작 사건이 만들어지던 시점이었다. 납북귀환 어부들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북에 강제로 끌려갔으면서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는 그들은 막강한 공권력에 대항할 미력한 힘도 없었다.
▲ 이성국 씨는 불법구금 기간 동안의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지금도 온몸이 성치 않다. 잦은 구타 속에서 고막이 나가 청력이 감퇴됐고 무릎과 팔꿈치, 허리도 정상이 아니다. 보면 알겠지만 코뼈는 아예 돌아간 상태다. 또 가끔씩 두통이 찾아오는데 아마도 전기고문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물론 그의 친구와 동료, 가족까지 공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단지 그와 말을 섞었다는 이유로 그의 몇몇 친구들은 며칠 동안 갖은 고문에 시달려 그가 각종 군사기밀을 빼돌렸으며 북과 접촉했다는 허위진술을 하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이 씨의 매형 천춘호 씨는 “1주일간 붙잡혀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은 처남이 군사기밀을 누출했으며 북한체제 우월성을 선전했다는 증언을 내게 강요했다. 결국 나도 허위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법당국의 진저리나는 고문과 진술 강요 속에 그들이 기획한 이 씨의 간첩혐의 씌우기 시나리오는 하나 둘 채워졌다. 결국 이 씨 스스로도, 모진 고문 속에서 허위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고문이 심했던지 이 씨는 자해까지 시도했다. 지금도 그의 손목에는 자해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진 고문 속에서 나의 혐의에 대해 허위 진술한 것은 다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할 뿐이다. 당시 너무도 힘들어 양철 재떨이를 찢어서 손목까지 그었다.”
결국 그는 1981년 12월, 징역 10년 형을 구형받고 억울한 옥고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한창 때인 스물일곱에 모든 것을 억압당한 것이다. 정치범으로 수용된 이 씨는 철장 안에서도 당시 악명 높던 ‘삼청교육대’에 동원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아들 옥바라지를 하던 부모님은 결국 아들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어 수감 중 에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투옥된 외조부 강경하 씨는 얼마 후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이 악화돼 출소 1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엄마는 나 때문에 국회의원과 대통령 등 탄원서를 안 낸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가족들이 숨겨서 2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다 나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어 돌아가신 거다. 그 전까지는 건강하셨던 분들이었다.”
1990년 출소한 뒤에도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수감생활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는 출소 후, 인천 등을 전전하며 직장생활을 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뒤에는 항상 경찰관들이 따라다녔다. 감시 속에서 정상적인 직장생활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알게 모르게 지속되는 주변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도 견디기 어려웠다.
“출소 후 생활은 더 막막했다. 사회적 불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상 공안 경찰관들이 따라다녀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최근까지 그러한 감시는 계속됐다. 가족들에게도 수시로 나의 동선을 확인하기 위한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이러한 삶이 내 자식까지 이어갈까봐 난 자식 낳는 것까지 포기했다.”
그러한 그에게도 희망의 빛줄기는 찾아왔다. 지난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위원회 조사기간 동안 이 씨의 혐의는 전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자료 조사결과 이 씨의 불법구금 사실이 드러났고, 고문 때문에 허위진술을 했던 증언자들이 진실을 말해줬다. 이 씨의 당시 증언 역시,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로 결론났다. 당시 고문을 했던 경찰관들은 위원회 조사에 출석했지만, 끝내 고문 사실은 부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지난해 6월,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이 씨와 외조부 강 씨에 대한 재심 재개 및 국가의 사과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6월 3일, 서울고법에서 진행된 재심에서 최종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 씨는 30년 동안 짊어져온 무거운 짐을 그제서야 내려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17세 소년은 환갑을 앞둔 반 노인이 되어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재판을 끝내고 또 다른 재판을 준비 중이다. 그는 그동안 겪은 고초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할 계획이다. 천금을 준들 청춘을 돌려받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의 보상은 받아야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터뷰 말미에 이 씨는 “나 이외에도 억울한 사람은 아직도 많다.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운 역사의 반복을 경계했다.
한병관 기자 wlimdou@ilyo.co.kr
‘태영호 사건’ 대표적 꼽혀
이성국 씨와 같은 납북귀환어부의 수난사는 우리 역사의 불편한 진실로 남아있다. 군사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책 속에 그들은 철저한 희생양으로 이용됐다.
납북귀환어부를 이용한 간첩혐의 조작사례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무래도 1968년 6월에 있었던 ‘태영호 사건’이다. 당시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출발한 목탄선 태양호는 병치어획을 위해 연평도 작업에 나서다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넉 달 만에 풀려난 선원들은 사법당국의 갖은 고문과 협박 속에 반공법 혐의로 형을 살게 된다. 2006년 당시 형을 선고받은 선원들은 진실화해위를 통해 누명을 벗게 됐고, 재판을 거쳐 법적구제를 받은 바 있다.
1965년에는 강화 미법도에서 조개잡이에 나선 어민 100여 명이 북에 납치된 바 있다. 당시 납북됐던 어민들은 한 달 만에 귀환했지만 공안사건 조작 속에 희생양이 됐다. 이 사건 역시 당시 연루됐던 어민들이 지난해 법적구제를 받게 됨으로써 과거 정부의 치부가 드러나게 됐다.
하지만 납북 어부 상당수는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기자와 통화한 납북자 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는 납북어부들이 많다. 그들의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들에게도 정부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억울한 서민들 이제 어쩌나
지난해 12월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기 위해 한시적으로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5년간의 조사기간을 마치고 잠정 폐지됐다. 신청사건만 1만 건을 넘었고, 그 중 75%가량 되는 8000여 건의 사건이 조사 작업을 통해 진실이 규명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동안 왜곡된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고 피해자들의 구제에 큰 도움을 줬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자와 만난 이성국 씨 역시 “진실화해위가 없었더라면 우리 같은 힘없는 서민이 재심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실화해위 폐지는 매우 안타깝다. 내 주위에도 아직 억울함을 풀어야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며 위원회 폐지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했다.
일각에서는 아직 들춰보지도 못한 사건들이 여전히 많다고 지적한다. 진실화해위 김주현 전 민원실장은 “종료시점까지 처리하지 못한 이의신청 사건과 국가에 대한 권고사항의 확실한 이행 문제가 여전히 걸린다”며 후속조치문제를 거론한 바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민간인 피살자 호남지역 유족모임’은 이명박 정부의 위원회 잠정 폐지에 대해 비판하면서 과거사 관련 재단 설립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