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줄 따스한 온기 담긴 47분, 10곡, 그리고 한 개의 앨범
지난 9월 2일 발매된 ‘모멘츠 인 비트윈’은 이제까지의 넬에게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띄는 앨범이다. 짧고 굵게 끊어 치는 음원들로 가득한 시장 속에 넘칠 만큼 꽉 담아 넣은 곡의 개수가 우선 그랬다. 여기에 그들이 이제까지 잘 다루지 않았던 사랑과 그 관계의 시작과 끝을 시간의 순서대로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점도 넬을 오래 사랑해 온 팬들의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이번 앨범은 아마 저희의 첫 시도일 수도 있는데, 드물게도 일련의 한 과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앨범이에요. 영화 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순간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모멘츠 인 비트윈’이란 제목이 붙여졌죠. 부제인 ‘비츠 앤드 피시즈’(Bits and pieces)가 붙여진 것도 그 과정 안에 담겨진 곡들이 하나의 조각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제목을 붙이게 됐어요.”
그들의 말대로 이번 앨범은 감정이 흐르는 과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따라갈 수 있도록 트랙을 나열해 한 편의 이야기를 리스너들에게 전달한다. “영화, 또는 소설로 표현할 수 있는 앨범”이라는 설명이 가장 잘 들어맞는다. “트랙의 1번부터 10번까지의 곡들을 가사를 생각하며 들으시면 ‘내가 한 편의 이야기를 들었구나’ 하는 마음이 드실 거예요.” 그들이 강조한 감상 포인트였다.
더블 타이틀은 ‘모멘츠 인 비트윈’의 또 다른 새로운 점이다. 4번째 트랙 ‘유희’와 6번째 트랙 ‘위로(危路)’가 넬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의 두 주인공이 됐다. 플레이 타임 5분을 넘기는 ‘유희’도 만만치 않았지만 6분 32초라는 길이를 자랑하는 ‘위로’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넬에게도 도전이었다. 현재 넬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이나 방향, 그리고 다양성까지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투 트랙 타이틀곡을 완성시켰다는 게 그들의 이야기다.
“부득이하게 타이틀곡을 2곡을 선정하게 됐어요. 먼저 ‘유희’라는 곡은 저희가 여태까지 해 왔던 곡들 중에서 가장, 그리고 꽤 만족도가 높은 곡이에요. 공연장에서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위로’라는 곡은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타이틀곡 선정에서는 당연히 제외됐을 법한 길이를 가지고 있죠. 6분 30초나 되니까요(웃음). 그런데 저희는 항상 앨범에서 어떤 타이틀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수록곡으로 치부되거나, 타이틀곡만큼 들려지지 않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어요. 타이틀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에너지나 애착이 그보다 덜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항상 뭔가 뒤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곡은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더라고요(웃음).”
넬은 이번 앨범을 통해 다양한 도전을 시도했다. 이전까지는 가슴 안에 묵직한 무게감으로 침잠하는, 밀도감 높은 곡을 선보여 왔다면 ‘모멘츠 인 비트윈’에서는 여백의 미를 살리기로 했다. 파국으로 향하는 관계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감정을 정리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불필요한 음을 버리고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를 남겨 놓았다.
“곡 스타일 자체가 다양한 편이기도 해서 하나의 사운드로 정리할 순 없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꽤 여백이 많이 느껴지는 사운드라고 생각해요. 기존에는 저희가 어떤 신스나 프로그래밍 머터리얼, 저희 연주 악기들을 가지고 밀도감이 높은 곡들을 보여드려 왔었죠. 여백보단 꽉꽉 채워진, 안에서 정리가 되는 사운드였는데 이번엔 필요 없는 소리들을 과감히 배제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리버브라든지 공간의 소리가 많이 느껴지는 그런 사운드를 전체적으로 담고 있어요. 그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에요.”
10개의 곡을 넘치게 담아낸 앨범 그 자체만으로도 물론 인상적이다. 앞서 싱글로 먼저 선보였던 ‘Crash’(크래시) ‘Don't hurry up’(돈트 허리 업) ‘Duet’(듀엣)에 ‘Don't say you love me’(돈트 세이 유 러브 미), ‘유희’ ‘위로’ ‘말해줘요’ ‘정야’ ‘Sober’(소버)의 7개 곡이 더해졌다. 총 47분의 러닝타임으로 채워낸 이 한 권의 이야기를 두고 넬은 “예전부터 이런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요즘 같은 음원, 싱글 시장에서 지금이 아니면 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시 앨범의 형태로 열 곡, 열다섯 곡씩 시디처럼 앉은 자리에서 노래를 쭉 듣는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 생각하는 건 사실 회의적이에요. 물론 나쁜 건 아니죠, 기술의 발전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안 하면 더는 못 할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늦기 전에 올해라도 꼭 반드시 끝을 내자. 물론 부담스러운 것도 없잖아 있어요. 하지만 그 부담보단 원하는 걸 하고, 그 결과물에 그저 어느 정도 만족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보람이 훨씬 더 크거든요.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하게 된 거죠.”
데뷔 후 어느덧 20년째 묵묵하게 ‘레전드 밴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대중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권태롭지 않은 태도를 늘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노력을 배신하지 않기에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이들은 음악을 향한 설렘이 곧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저희가 이래서 많은 분들이 저희를 아껴주신다고 딱 집어서 말은 못 할 것 같아요(웃음). 추측 아닌 추측을 해 보자면 저희 스스로가 아직도 음악 작업을 하는 것에 설레고, 예전보다 더 좋은 음반을 만들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게 들으시는 분들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열정이 식으면 굉장히 올드하게 느껴지거든요. 저희는 스스로 계속 열정을 더욱 키워가고 있고, 그런 부분들이 들으시는 분들에게도 느껴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저희를 아껴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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