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서봉수 9단, 박영진 아마 7단, 조민수 아마 7단. |
모이는 장소는 역시 왕년의 전국구 강타자 강영일 7단(57)이 운영하는 한국기원 분당지원이며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 알룩스의 백정훈 대표(65)가 회장이다. 백 회장은 인터넷 바둑사이트 타이젬 6단. 요즘은 아마 고수들이 수인사를 나눌 때 “타이젬 몇 단이시냐?”고 묻는다. 타이젬 6단이면 공인 아마5단 이상의 실력이다.
아무튼 이들이 7년 전에 만든 대회가 분당기우회장배 시니어 바둑대회다. 만 40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항을 내걸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둑대회도 시쳇말로 젊은 아이들 판이라 나이든 사람들은 설 자리가 별로 없게 된 상황인지라, 젊은 너희끼리만 노냐? 나이든 우리도 우리끼리 놀겠다는, 이런 단서 자체가 참신하고 독특했고, 회원들이 십시일반하고 대부분은 백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만든 상금도 컸다.
지난 6회 때는 우승 상금이 500만 원. 동호인 대회 비슷한 이름의 대회였지만, 상금은 아마대회 중 최고 수준이었던 것.
올해는 백 회장이 한 번 더 베팅! 상금을 우승 1000만 원, 준우승 300만 원으로 확 올리면서 프로-아마 오픈을 천명했다. BC카드배 LG배 삼성화재배 같은 세계프로기전이 아마추어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이 엊그젠데, 이번에는 거꾸로 아마 쪽에서 프로에게 문을 연 것. 대국은 아마가 흑을 잡고 덤 5집을 받는 조건.
아마 강자들 전부는 물론 천하의 서봉수 9단(58)을 필두로 서능욱(53) 정대상 (54) 9단, 천풍조 8단(64), 김학수(55) 김종수(51) 7단, 나종훈 6단(54) 차민수(60) 박영찬(51) 4단 등 중견 프로 쪽에서도 호응해 중년의 프로와 중년의 아마가 맞붙었다.
팬들이 신났다. 일세를 풍미했던 서봉수 사범, 속기의 달인 손오공 서능욱 사범, 라스베이거스의 갬블러이자 <올인>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 사범 등이 아마추어 대회에 나와 강호무림의 강자들과 진검승부를 펼치다니.
예전에도 그랬고 얼마 전에도 그랬고, 프로-아마대항전이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수고치기. 프로가 한 수 접어주고 두는 친선에 가까운 경기였다. 그러나 이번엔 선에 덤 5집. 아직 호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깔고 두는 게 아니라 표면상으로는 맞두는 것.
무림대회전에 출전한 고수들은 128명. 23일 첫째 날, 성남 실내체육관에서 4명씩 32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 → 각조에서 2명씩 올라가 64강 → 32강까지 네 판을 두고, 24일 둘째 날, 한국기원 분당지원에서 전날 가려진 32강을 16명씩 A, B조로 나누어 조별 토너먼트 → 조별 8강 → 조별 4강까지, 세 판을 둔 다음 마지막 날 25일 왕십리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4강전(준결승)과 결승을 치렀다.
우승 후보는 단연 서봉수 9단이었다. 그래서 우승 후보보다 더 궁금한 것은 ‘결승의 상대가 누구냐?’였다. 일단은 서능욱 9단이 유력해 보였다. 차민수 4단을 지목하는 사람도 많았다. 워낙 큰 승부에 강한 사나이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20여 년 전 차 4단이 저질렀던 대형사고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에서 포커만 하는 줄 알았는데, 후지쓰배에 미국 대표로 출전하더니 일본의 9단들을 거침없이 무찌르며 8강까지나 올라가지 않았던가. 조치훈 9단도 꺾지 않았던가.
정대상 9단, 박영찬 4단도 표를 꽤 얻었다. 정 9단은 서능욱 9단과 쌍벽을 이루는 속기에 난전의 명수. 박 4단은 서봉수 9단과 같은 과에 속하는 야성의 잡초류. 승단대회에 초연해 여태 4단에 머물고 있는 방랑기객.
그러나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결과는 달랐다. 박영진이 A조 8강전에서 박영찬, 4강전에서 서봉수를 제쳤고, 조민수가 B조 4강전에서 차민수, 결승에서 서능욱에게 이긴 것. 폭풍의 이변이었다.
차 4단은 조민수 7단을 만나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선에 덤5집이면 치수가 안 맞는 거야. 그냥 선으로 해도 만만치 않고, 호선도 몰라요. 최대한 양보한다 해도 선에 덤2집, 그게 한계일 거야.”
서봉수 9단은 첫날 네 판을 두고 나서 머리를 짚었다. “대회 바둑을 하루에 네 판 두기는 난생 처음이네. 나중엔 머리가 멍해져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다음 날 또 세 판을 두어야 한다고 하자 “어이쿠!” 하면서 웃었다.
랭킹 20위권의 젊은 프로들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서봉수 서능욱 차민수 정대상이라 해도 아마 정상들을 선에 덤 5집을 접어주는 것은 ‘불리한 치수’임이 밝혀진 셈이다. 그리고 판수, 이게 큰 변수일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아마는 정상급이라 해도 대회에 나가면 하루에 네다섯 판은 기본이고, 수십 년 그런 강행군으로 단련했으니 그 점에서는 아마가 월등 유리하다는 것.
게다가 지금은 프로 고수들의 기보와 그들이 구사하는 수법이 낱낱이 공개되고 있으며, 젊은 프로들은 공동연구를 하지만, 중년들은 그게 별로 없는데 반해 아마 고수들은 분당기우회나, 지난번에 소개한 바 있는 압구정리그 등을 통해 부단히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 등도 아마의 승인으로 꼽혔다.
지지옥션배도 있다. 중년 남자 프로기사와 젊은 여자 프로기사가 연승전으로 겨루는 대회. 그 전초전이 ‘아마 지지옥션배’다. 중년 남자 아마정상급들과 연구생 출신의 젊은 여자 아마강자들이 연승전을 벌이는 대회. 올해도 시작되었는데, 첫 판에서 박영진이 공주 같고 인형 같은 송예슬에게 이겼고, 박한솔이 박영진에게 이겨 빚을 갚자 맏형 임동균이 다시 박한솔에게 이겨 남자 팀이 앞서가고 있다. 지지옥션배는 국내기전 중에서는 제일 인기다. 투자 대비 홍보 효과가 그만이다.
이세돌 박정환 같은 젊은 천재 프로, 무시무시한 연구생들이 빛나지만, 위에 등장한 중년들의 역할도 필요하다. 세상은 젊은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고, 세계대회만 재미있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다양하고 재미있는 대회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어떤 대회든 10초 바둑 같은 것은 이제 그만 없어졌으면 좋겠다. 10초 안에 뚝딱 뚝딱 두는 게 무슨 바둑이냐고 고소하는 팬들이 많다. 시간을 들여야 김치도 익고 고기도 숙성되는데, 10초 동안 어떻게 멋진 수가 나오고 오묘한 바둑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거다. 젊은이들에게도 시간의 의미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젊은이들을 바둑 사이보그로 만드는 게 뭐가 그리 좋은 일인가.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