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왼쪽)과 허구연 해설위원. |
KBO 유영구 총재의 구속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이 “학교법인 명지학원의 자금으로 수익 사업체인 명지건설을 부당 지원한 혐의(배임 및 사립학교법 위반)로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을 수사 중”이라 발표한 것. 당시 유 총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혐의를 자신했지만 검찰은 같은 해 12월 유 총재를 출국금지시키며 수사망을 좁혔다. 결국 유 총재는 사건이 불거지고 나서 6개월 만인 5월 3일 구속됐다.
야구계의 충격은 유 총재의 구속보단 사퇴였다.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도 KBO 고위 관계자는 “설령 총재님이 구속돼도 총재 취임 이전의 문제와 관계된 것이므로 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나기 전까지 총재직은 그대로 유지하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유 총재는 구속되기 하루 전 제 발로 KBO에 찾아와 사직서를 냈다.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유 총재가 직감했다는 후문이다.
유 총재의 낙마로 가장 곤혹스러운 이들은 8개 구단 사장들이다. 자신들이 직접 유 총재를 옹립했기 때문. 옹립 당시 명분은 거창했다. ‘정치인, 각료 출신의 낙하산 총재가 아닌 민선 총재야말로 프로야구를 책임 있게 이끌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역대 전임 총재 가운데 민선 총재는 12~14대 수장이었던 고 박용오 총재가 유일했다. 역대 총재 대부분은 임기 중 입각 혹은 국회의원 당선 등으로 도중하차하거나 개인 비리로 낙마했다. 그러나 유 총재 취임 과정을 상세히 아는 한 야구인은 숨겨진 내막이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원래 신임 KBO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종웅 전 의원으로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한 구단 구단주가 구단 사장에게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을 밀 것’을 지시하며 일이 틀어졌다. 이 구단주와 유 전 이사장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구단주의 지시를 받은 구단 사장이 다른 구단 사장들을 설득했고 얼마 후 구단 사장들이 한 호텔에서 모여 유 전 이사장을 KBO 총재로 모시기로 결의했다.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가 ‘사전 협의가 없었다’며 발끈했지만 워낙 언론을 비롯해 야구계가 낙하산 총재에 거부감을 나타내자 문광부도 한발 물러섰고 우여곡절 끝에 결점이 많았던 유 전 이사장이 17대 KBO 총재로 취임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결점이 많은 유 전 이사장’이란 대목이다. 유 총재는 취임 이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로부터 ‘명지건설의 전 회장으로서 법적 도덕적 책임이 없느냐’는 공개 질의를 받았다. 당시 선수협은 유 총재가 명지대학 교비를 명지건설에 부당 지원했다는 세간의 소문을 수집했던 차였다. 그러나 유 총재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구단 사장들은 “신임 총재 흠집 내기”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2년 2개월 뒤 유 총재는 구속됐고 유 총재를 옹립했던 사장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KBO 야구규약상 총재가 사임·해임 등의 사유로 공석 땐 1개월 이내에 8개 구단 사장들이 참가하는 KBO 이사회에서 새 총재를 결정해야 한다.
야구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신임 총재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인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유 총재가 사퇴 전까지 주도한 9구단 선수수급과 10구단 창단 그리고 대구·광주 새 구장 건설을 차질 없이 이어갈 수 있는 야구계에 정통하고 추진력을 갖춘 인사다. 두 번째 KBO 개혁과 야구계 현안을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소신 있고 청렴한 인사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야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아마추어 야구와 연계해 전체 야구계 발전을 이끌 수 있는 행정력과 정치력을 갖춘 인사가 그것이다.
현재 야구계의 세평에 오르는 차기 KBO 총재 후보는 허구연 MBC 해설위원과 정운찬 전 총리가 대표적이다. 허 위원장은 KBO 실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냈고, 지금도 10구단 창단 작업을 물밑에서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마추어 야구지원과 ‘허프라’로 불릴 정도로 야구 인프라 확충에 열성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법학석사 출신에 영어 일어에 능통해 행정력을 갖췄고, 정·재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정치력도 갖췄다는 평가다. ‘야구인 출신 최초의 KBO 총재’라는 상징성 때문에 야구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해설가로 남겠다며 끊임없는 정계진출과 구단 사장 제의를 고사했던 허 위원이 과연 KBO 총재직을 수락할지 불투명하다.
정 전 총리는 야구인 출신은 아니지만 야구계를 잘 아는 한편 대통령과 독대가 가능한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힌다. 총리 시절엔 바쁜 와중에도 아마추어 야구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정 전 총리는 과거 “KBO 총재가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계 수장직에 애착이 있다. 하지만 현재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진출도 유력한 상황이라, 총리 출신의 거물 입장에선 비교적 한직인 KBO 총재를 맡을지 의문이다.
한 구단 단장은 허 위원을 ‘실속형 총재’, 정 전 총리를 ‘실세형 총재’로 표현하며 “어느 누가 총재로 취임해도 야구계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며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