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진행된 김영완 관련 민사소송 자료 중 일부. |
이처럼 8년여 동안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잠적생활을 해 온 김 씨의 행적이 최근 여권 핵심부에 의해 꼬리가 잡힌 것으로 알려져 사실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요신문>도 김 씨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은신하고 있다는 정황이 담긴 문건을 단독 입수했다.
김대중 정권 때 불거진 각종 미스터리한 대형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줄 김 씨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수년 전부터 여야 정치권은 김 씨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김 씨가 과거 정권 때 불거진 숱한 권력형 사건 및 풀리지 않은 대형 사건들에 깊숙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 한마디는 정치권을 뒤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2007년 대선정국 당시 여야 대선캠프 측이 은밀히 김 씨와 접촉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던 것도 그가 지닌 파일의 파괴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로 김 씨는 김대중 정권 시절에 불거진 대형 게이트 사건에 두루 연루된 인물로 알려졌다. 특히 김 씨는 여전히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대북 비밀송금 의혹 및 현대 비자금 사건의 실체를 밝혀 줄 핵심 키맨으로 지목받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4월 시작된 대북송금 특검팀은 “2000년 4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으로부터 현대건설 소유의 CD 150억 원을 받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던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이후 특검팀은 김영완 씨가 CD를 명동사채시장에서 세탁한 것을 확인했으나 김 씨가 미국으로 도피해 사실관계를 규명하지는 못했다.
특검팀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박지원 대표에 대한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수사를 맡은 대검 중수부는 문제의 CD가 이 전 회장과 김 씨를 거쳐 현금화되는 과정을 포착하기는 했으나 그 돈이 박 대표에게 건네졌다는 의혹은 입증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검찰은 ‘박지원 전 장관의 비자금 150억 원을 관리해왔다’는 김 씨의 자필진술서를 바탕으로 박 대표를 구속기소(2003.9)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박 대표에게 각각 징역 12년을 선고했지만 2004년 11월 대법원은 ‘150억 원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김 씨가 해외에서 작성한 진술서의 신빙성 및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대법원은 김 씨 진술서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아 박 대표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지만 김 씨가 입국해 자신의 진술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할 경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재점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대표와 구 여권 인사들은 김 씨의 존재가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반면 여권 입장에선 김 씨를 내년 총선이나 대선정국과 맞물려 야권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호재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여권 핵심부가 정보·사정라인을 은밀히 가동해 김 씨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보·사정라인을 동원한 여권 핵심부의 끈질긴 추격전 끝에 얼마 전 김 씨의 은신처가 꼬리를 잡힌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기자와 만난 정보당국의 한 고위관계자는 오프를 전제로 “여권 수뇌부의 밀명을 받은 미국 파견 정보원들이 수년간 은밀히 김 씨 행적을 추적해 온 게 사실”이라며 “이러한 노력 끝에 지난해 7월경에 김 씨의 은신처를 알아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은신처 주소지가 어디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은신하고 있는 것만 파악될 뿐 구체적인 주소는 알지 못한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국내 소환 여부 및 시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신변이 확보된 만큼 국내 소환에 따른 법률 검토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소환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정보당국 일각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김 씨의 신변을 확보하고 ‘관리’ 모드로 돌입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형국이다.
<일요신문>도 최근 김 씨가 오렌지카운티에 은신해 왔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황이 담긴 문건을 입수했다. 문건은 다름 아닌 미국에서 진행된 소송 사건 사본이다. 재판 과정에서 김 씨가 오렌지카운티에 다른 사람의 명의로 저택을 소유하고 은신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코리아나뉴스는 지난 2006년 9월 오렌지카운티 법원에 김영완 이익치 오성우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이 소송에서 김 씨가 차명으로 소유한 주택의 주소 등이 공개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송의 사건번호는 06CC10191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송과 관련해 법원에 제출된 서류에는 김 씨가 차명으로 소유했던 주택이 9HILLSBOROUGH NEWPORT BEACH CA 이고, 원고 측은 이 주택의 시가가 적어도 250만 달러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택은 2004년 6월 18일 B 씨에게 무상증여됐다고 원고 측은 설명했다. 또 1998년 12월 B 씨는 L 사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나 이 회사는 종업원이 없는 유령회사로 김 씨의 재산을 은닉하는 도구로 사용됐다고 원고 측은 주장했다.
원고 측이 소송을 제기하자 잠행을 계속하던 김 씨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고, 변호인을 통해 재판부에 소송기각을 요청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 씨의 변호인 측은 이 주택이 ‘차명으로 된 김 씨 소유’라는 원고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원고 측 주장 중 일부인 전화통화녹음, 은행계좌공개 등이 불법이라며 소송 기각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 측이 주택 소유 관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음에 따라 한인사회에서는 원고 측의 주장대로 김 씨의 차명 주택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김 씨는 현재 이 주택에 기거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인사회 주변에서는 김 씨가 여전히 오렌지카운티 일대에 숨어 지내고 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일요신문>이 입수한 문건 내용과 앞서 정보당국 관계자가 귀띔해준 은신처가 모두 오렌지카운티라는 점에서 김 씨의 행적이 여권 핵심부에 의해 파악됐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여권 핵심부가 김 씨의 신변을 확보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야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음모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권이 김 씨를 회유해 정치적으로 악용할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여권 핵심부가 김 씨의 행적을 파악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며 “여권이 내년 총선과 대선정국을 즈음해 김 씨를 입국시켜 정치적으로 악용할 경우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여권 핵심부가 김 씨의 신변을 확보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또 야권 일각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음모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김대중 정권 시절에 불거진 각종 대형 게이트 사건의 열쇠를 쥔 김 씨가 언제 어떤 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지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