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재창간한 <일요신문>의 스포츠 기사 최초 특종의 주인공은 신용균 KIA 3군 코치(73)였다. 1992년 8월, 심상치 않은 ‘철새들의 이동’이 <일요신문>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시즌 내 이동설이 무성했던 구단들 가운데 쌍방울에서 먼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 지도력 누수로 인한 팀의 분열 현상을 우려한 쌍방울은 극비리에 감독 선임을 추진했고, 이에 신용균 당시 태평양 코치가 낙점된 것이다. <일요신문>은 “신용균 전 태평양 수석코치, 쌍방울 지휘봉 잡는다”는 특종으로 창간호 지면을 장식했다. 시즌 중이라 관계자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시기였기에 본보의 특종은 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엔 김인식 전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맞트레이드식 교체설이 나돌았다. 그런가하면 당시 해태 수석코치로 있던 백기성 코치의 감독 영입설도 있었다. 때문에 신 코치 역시 본인이 감독으로 선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워낙 물망에 오른 감독 및 코치들이 많았다. 김진영 전 롯데 감독으로 확정됐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래서 이용일 부회장과 골프장에 갔다가 ‘김진영 감독으로 확정됐느냐’고 물었는데, 이 부회장이 ‘무슨 소리냐’며 나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얼떨결에 쌍방울 지휘봉을 잡게 됐다.”
신 코치는 한국 싱커의 효시다. 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의 감격을 기억하는 올드팬이라면 신용균 이름 석 자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재일동포 출신의 사이드암 신용균을 에이스로 내세워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야구사상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꺾은 최초의 일이자, 해방 후 18년 만에 ‘타도 일본’이란 숙원을 푼 통쾌한 경기였다. 신 코치는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5년간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삼미-OB-태평양-쌍방울-해태-삼성을 거치며 지도자로 활동하며 정민태 임창용 김병현 조성민 등 일급 투수들을 키워냈다. 현재 육성군 성격의 KIA 3군 코치로서 선수 전력 보강에 힘쓰고 있는 신 코치는 “우승 감독을 못해본 게 아쉽지만 내 손을 거친 많은 선수들이 한국의 대표 투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본 건 크나큰 행복이었다”며 세월을 잊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