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보자. 상변과 우변의 백 대마가 양곤마로 몰리다가 용케 둘 다 수습한 모습이다. 허 8단의 공격도 매서웠지만, 구리의 타개 솜씨도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근래 다소 하향세라는 얘기도 있지만 여전히 실력 세계 정상급, 아직은 내리막길 운운한 계제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허 8단이 흑1로 붙였다. 백이 양곤마를 수습했지만 그걸로 전세가 바뀐 것은 아니고, 근소하나마 흑 유리의 상황. “흑1은 <1도>를 기대한 것. 당연히 백1로 젖힐 것이고, 그러면 흑2, 4로 끼워잇는다는 것. 백5쪽을 이을 때 흑6으로 젖혀 중앙 집을 확정해 놓고 좌하 흑8로 밀어간다. 백은 A의 단점 때문에 우하 흑진에 대해 함부로 수단을 부리기도 어렵다”는 것이 검토실의 설명이었다. 좌하 흑8, 지금은 여기가 아주 큰 곳. 이걸로 흑의 유리는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리 9단의 응수는, <장면>으로 돌아가, 우하귀 백2! 스텔스 정찰기를 방불케 하는 기묘한 저공비행이다. 아마추어 고수가 하수를 홀릴 때 쓰는 그런 수법. 관전객들은 처음에는 기보가 전달될 때 실수한 줄 알았다. 백B로 붙인 것을 마우스미스한 거겠지. 요즘은 기보 기록도 노트북으로 한다. 백B의 3-3 붙임이라면 종종 보는 수. 귀살이를 노리는 응수타진이니까.
그러나 백2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 검토석에서 “타이밍이 꼭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우하 흑진을 삭감하는 방편의 하나로 일리 있는 수”라고 모두 예상하고 있던 수였다는 것.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2도> 흑1쪽을 막으면 백2, 4가 들어 이쪽에서 활용할 수가 있다. 다음 백6, 하변에 생기는 백집이 짭짤하다.
성질대로라면 <3도> 흑1쪽을 막아 <2도>와 같은 백의 얄미운 활용을 주지 않으면서 잡으러가고 싶지만, 만만치 않다. 백2에는 흑3으로 늦추어야 하는데, 백4로 계속 나가 이건 맛이 너무 나쁘다. 백A로 이 돌이 움직여 나오는 것도 꺼림칙하다. 맛은 맛이고, 수만 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은 맞지만, 맛이 나쁜 곳은 언젠가는 탈이 나는 법. 바둑 두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으로 인정하는 바다.
<4도>는 실전진행. 구리 9단이 허 8단의 질문에 동문서답했듯 허 8단도 앙칼져 보이는 우하귀 극소형 정찰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흑1로 중앙을 젖혀 버린다. 이른바 기세. 이걸로 백의 중앙 세력은 일단 무너졌다. 검토실도 “좋은 수”라고 찬성한 젖힘이다.
동문서답이 계속된다. 백2로 즉각 움직임 개시. 이제 귀살이는 가능해진 모습이고 흑도 1로 젖힐 때는 살려 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도 흑3으로 하나는 물어본다. 귀살이의 급소.
그런데 사실은 구리 9단도 귀살이가 목적은 아니었다. 멀리 뛰어가 백4의 코붙임. 노리던 것은 이거다. 우하귀 백돌들은 백4를 위한 징검다리였던 것. 적군이 둔 수지만 산뜻하다. 조금 아프다. 당장 백A로 1선을 젖히면 넘어간다.
<5도>가 이어진 실전. 흑1로 일단 패를 따내자 백2로 막는다. 귀에서 크게 살자고 하는 것을 팻감으로 쓰는 것. 흑3으로 막고, 백4 패 따내고, 흑5로 상변 백 대마에 팻감 쓰고, 백6 받고, 흑7로 돌아와 다시 패 따내자, 백8로 일어서고 있다. 흑9에서 백12까지 백은 귀살이 정도가 아니라 우하 흑진을 거의 다 지우며 살았다(흑7은 흑1 자리 패 따냄, 백4,14는 백 자리 패 따냄).
<4도> 흑3 때 <6도> 백1로 받으면 흑은 2로 가고 백이 3~7로 살 때 흑8로 단수치며 중앙을 제압한다. 백이 조그맣게 살기는 했으나 우변에서 중앙으로 흘러나온 대마가 다시 몰린다. 이건 흑이 원하는 그림. 흑은 불만이 없다는 것.
또 <4도> 백4 때, 이번에는 흑이 패싸움을 겁내 <7도> 흑1로 물러서 자중하면 백은 물론 4로 넘어간다. 이건 백이 좋다는 것.
그나저나 <5도>의 시점에서는 역전인가? 아니다. 방금 말했듯 흑도 우하에서 백이 수를 내기 전에, <5도> 흑으로 중앙을 젖혀 좌하 방면 백세를 지운 것이 컸고, 우하 접전에서 선수를 잡아 좌하 흑15를 차지해, 이걸로도 아직은 흑이 조금은 좋다는 것.
역전극은 이후에 일어난다. 지면상 역전의 과정을 보여 드리지는 못하는데, 흑은 좌하 쪽 A의 곳을 끊고, B로 올라서고, C의 곳을 뚫고 해서 하변에 산재한 백들을 다 잡아 들여 거대한 집을 지었고, 백은 그러는 동안 D에서 E를 연타해, 조금 전까지 패싸움을 벌였던 곳, 흑1-3-9-11과 들을 전부 잡았다.
엄청난 바꿔치기. 일견 대마가 거꾸로 잡힌(사실은 버린 것이지만) 흑이 손해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하변 통집이 워낙 커 득이면 득이지 손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바둑이 결국 백의 불계승으로 끝나고 만다.
허 8단은 비록 졌으나 보여 줄 것은 충분히 보여 주었다. 준엄하고 신랄한 공격, 대마를 버리고 하변을 통식하는 배포는 검토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큰 승부에서 대마를 버리면서 확실한 손해를 먼저 보는 바꿔치기를 결행하는 것은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다만 아직도 1% 정도가 모자란다는 게 아쉬움이었다.
이광구 바둑담당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