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BK 의혹’을 폭로한 김경준 씨의 ‘기획입국설’을 뒷받침할 물증으로 한나라당이 제시한 편지가 조작됐다고 폭로한 신명 씨. 지난 4일 그를 천안아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나 자세한 내막을 들어 봤다.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내욕심에 잘못된 판단을 했다. 나는 정치판의 생리를 몰랐고 어리석었다. 어쨌든 ‘편지 대필’을 하고 국민을 우롱했으니 죄를 지은 것이 맞다. 처벌도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저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울분이 터진다. 도둑질 시켜놓고 나를 도둑놈이라 고발하는 모양새 아닌가?”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때이른 레임덕 얘기마저 나돌고 있는 시점에서 신명 씨의 등장은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편지를 쓴 사람은 형(김경준의 감방동료 신경화 씨)이 아니라 나다. MB(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지시를 받고 당시 여당(민주당)이 김경준 씨의 기획입국을 꾀했다는 편지를 작성했다”는 신 씨의 주장에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2007년 대선 직전 벌어진 편지 조작에는 편지 작성자인 신명 씨-신 씨에게 편지대필을 권유한 신 씨의 30년지기 Y 씨-배후에서 Y 씨에게 지시를 내린 MB 최측근 2명 등 최소 4명의 핵심인물이 개입돼 있다. 이외에도 신 씨는 배후에 MB 측 인사 두 명이 더 있다고 주장했다.
야권에서는 이미 ‘윗선’으로 한나라당 친이계 핵심 A 의원, 현직 장관급 관료 B 씨를 ‘배후’로 지목한 상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신 씨의 편지를 근거로 김경준 기획입국을 폭로했던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전과자가 감형 안 해준다고 그 가족이 아마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양인데”라며 편지 조작에 ‘윗선’이 개입됐다는 신 씨의 주장을 일축했다.
‘전과자 가족’ 발언에 ‘열받은’ 신 씨는 “5장으로 된 편지 조작 지시 문건이 있다”며 매머드급 추가 폭로를 예고하고 나섰다.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당시에는 형을 살려야겠다는 심경으로 Y 씨의 제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쪽’에서는 이런 내 절박한 상황을 철저히 이용했다. Y 씨는 두려워하는 내게 ‘괜찮다. 법적인 문제도 윗선에서 대처해놨기에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Y 씨를 전적으로 믿은 데다가 뒤에 모든 일을 수습할 힘을 지닌 두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응한 것이다. 당시 그쪽에서 제시한 것은 형의 감형이 아니라 ‘원상복귀’였다. 자세한 정치적 내막은 몰랐지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감형 정도로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만 지켜졌더라면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긴 했겠지만 후회는 안했을 것이고 영원히 묻어뒀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나는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데 죄를 짓도록 시킨 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전과자 가족’이라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배신감 때문에 나서게 됐지만 더 이상 공작정치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사건 이후 신 씨의 생활은 180도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제법 규모 있는 치과를 운영하던 그는 현재 지방의 치과에서 봉직의로 일하고 있다. 병원과 집밖에 몰랐던 그는 검찰에 수차례 불려 다니는 수모를 당했고 기자들의 등쌀을 피해 본의 아니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일각에서는 ‘배후’를 운운하며 정치적 의도가 있는 행동이 아니겠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친척들에게까지 모처에서 ‘회유’가 들어오는가 하면 ‘전과자 가족’ 발언에 상처받은 와이프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울고 있다고 한다. “썩어도 준치라고 전문기술이 있기에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고 신 씨는 토로했다.
경북 북부교도소에 수감 중인 형 신경화 씨의 상황도 더 나빠졌다. 신 씨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13일 동안 ‘지시’대로 “내가 시켜서 동생이 썼다”고 앵무새처럼 진술했지만 미국으로의 귀환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사이 가정이 파탄 난 것은 물론이고 현재는 건강악화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앞니가 다 빠지고 키 185㎝의 거구는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얼마 전 접견가서 ‘있는 그대로 얘기하자. 누가 시켜서 한 거면 시켜서했다, 거짓이면 거짓이다’라고 말하자고 했지만 답이 없다. 형기가 19개월이나 남아있는 형 입장에서 입을 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수감 중인 형과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다. 형은 지금 밖의 상황도 거의 모르고 있다. 내가 대선 전 추가폭로를 할 거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형제끼리 말을 맞췄네 어쩌네’ 하고 꼬투리를 잡을까봐 접견도 못가고 있다.”
현재 가장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신 씨가 추가로 폭로하겠다는 문건의 내용 및 공개시점이다. ‘윗선’의 지시를 받고 Y 씨가 자필로 작성했다는 이 문건은 Y 씨와 신 씨 진술이 일치하도록 미리 짜놓은 ‘지시서’로, 실제로 신 씨는 검찰 조사에서 이 문건대로 답했다고 말했다. 신 씨는 “Y 씨의 말만 믿고 무시무시한 특수부에서 거짓말을 했겠는가”라며 배후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했다. 따라서 이 문건은 현재 신 씨의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로 추정되고 있다.
우선 문건 필적 감정결과 Y 씨의 필적으로 확인되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물꼬는 트이는 셈이다. Y 씨가 그런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수사 속도에 상당한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Y 씨가 ‘윗선’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문건을 자필로 작성할 이유가 없거니와 신 씨에게 “내가 이렇게 진술했으니 너도 이렇게 진술하라”며 굳이 입을 맞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과정을 살펴볼 때 이런 엄청난 일을 대학교 교직원인 Y 씨가 혼자 꾸몄다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다. 신 씨는 “문건들을 세 곳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일단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보궐선거 후 문건을 공개하고 ‘그쪽’ 반응을 봐서 실명도 폭로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신 씨를 설득해 재보궐선거 후 공개하겠다는 지시서 원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문건에는 당시의 세세한 상황은 물론 검찰조사에 대비한 대처법 등 구체적인 질문과 대답들이 번호까지 매겨진 상태로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일부 내용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OOO은 왜 만났나- 신명이 대신 만나면 어떠냐고 해서 만났다.
▲무슨 얘기를 나눴나- 듣고있는 입장이고 신경화를 통해서 BBK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고, 신경화가 개입되면 신명의 가족사가 알려지게 되는데 곤란하지 않느냐, 그럼 각서를 써 주겠다고 하였다.
▲누가 먼저 연락했냐(11월 5일)- OOO이가 먼저 전화가 왔고 신명이가 OOO에게 나 대신 XXX을 만나보라고 OOO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OOO전화도 나에게 알려주었다.
▲OOO을 만나고 XXX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했냐.
▲OOO에게 먼저 왜 전화를 많이 했냐
▲편지내용은 무슨 내용?(누가 지시)-경준이하고 미국에 있을 때 먼저 나가면 한국 분위기가 어떠냐고 확인하고 편지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다.
▲검사가 물어보면 2가지 내용을 사실대로 대답해라.
이 외에도 OOO 변호사와의 관계, 편지는 무슨 이유로 보냈나, 누구 지시에 의해 보낸 것 아닌가, 편지·메모지(OOO각서)가 어떻게 공개됐나 등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날짜와 장소를 포함해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문답식으로 적어놓은 것은 추후 동일한 진술로 입을 맞추려는 의도를 짐작케 했다.
기자는 또 다른 중요한 문건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김경준 씨가 2007년 8월 단골승객인 A 씨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곧 이명박 비리를 폭로하겠다” “10월 초 한국에 갈 것이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편지였다. 또 2008년 4월 6일 신경화 씨가 동생 신명 씨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 편지가 병원 우편함에 들어있다가 명이 네가 출근해 직접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이 글을 본 후 이 형한테 직접 답장을 썼다면서 끝까지 우겼던 지난 일들은 결국은 우긴 사람 주장대로 되겠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현재 신 씨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더불어 앞으로 벌어질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예상하고 있었다.
“검찰이 문건 등 증거물을 싹 압수하고 나를 추방시키면 어쩌겠는가. ‘윗선’에서는 Y 씨에게 모조리 덮어씌우고 Y 씨는 나몰라라 발을 뺄 가능성도 다분하다. 현재 모든 것을 속 시원히 공개하지 못하고 적정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도 현 정권의 집권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촉각은 신 씨가 거론할 ‘윗선’의 실체에 집중되고 있다. 단계별로 차근차근 대처할 계획임을 밝힌 신 씨는 총선 전 편지조작에 개입한 MB 측근의 실명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섣불리 공개했다가는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거나 되레 빠져나갈 빌미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간에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폭로전으로 치부될 것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도 변수는 있을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 사건이 ‘전과자 가족의 원맨쇼’로 종결되는 것이다. 신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서 Y 씨와 ‘윗선’이 모두 빠져나가면 신 씨 혼자 ‘독박’을 쓰게 되는 최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신 씨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신 씨는 인터뷰 말미에 “Y 씨의 자필 지시서가 공개돼도 ‘그쪽’에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갈 수작을 부릴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온갖 얘기들을 갖다 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대비해서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될 최후의 히든카드를 남겨두고 있다. ‘전과자’ 가족의 주장이라며 ‘공작적 요소가 있다거나 법적으로 잘못된 게 있었다면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홍준표 최고위원이 그때 가서 어떻게 책임질지 두고보겠다”고 강조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약속된 보상 못받은 듯한데…”
현재 사건의 진실을 풀 수 있는 키맨은 단연 Y 씨다. 신 씨에 따르면 Y 씨는 신 씨가 치대에 다닐 때부터 학자금을 지원해주는 등 신 씨를 도와주고 아버지처럼 보살펴 준 인물이다. 신 씨는 편지대필을 한 결정적인 이유로 30년간 쌓아온 Y 씨와의 인연 및 깊은 신뢰를 들었다. “Y 씨가 아니었다면 절대 못했을 것이다. ‘윗선’에서 내게 직접 접근했으면 겁이 나서 더 못했다. ‘윗선’에서 Y 씨에게 접근한 이유도 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정치판이 정말 무서운 곳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따라서 신 씨의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Y 씨의 ‘양심선언’이 가장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신 씨는 “모든 진실을 Y 씨가 알고 있다. 공기업 감사 등으로 갈 거라고 들었지만 결국 무산된 걸 봐선 Y 씨도 속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 씨는 Y 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Y 씨가 자신에게 ‘형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편지대필을 제안했지만 보직 등을 언급하며 접근한 ‘윗선’의 제안을 개인적인 욕심에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역시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일거라는 것이 신 씨의 판단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신 씨와 MB 측근과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 Y 씨는 신 씨의 기획편지 주장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는 편지대필을 제안하면서 Y 씨가 그토록 많이 언급했다는 ‘윗선’의 실체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다. Y 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던 신 씨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Y 씨가 ‘윗선’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편지조작과 관련된 Y 씨의 강한 부정은 더욱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핵심은 Y 씨가 ‘윗선’을 들먹이며 신 씨에게 편지대필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신 씨가 우려한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는 분위기다.
실제로 신 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제 Y 씨가 사실을 말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는 이대로 덮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Y 씨에 대한 ‘윗선’의 ‘물밑작업’ 및 ‘사전조치’ 가능성 등과 관련된 질문에 신 씨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오프더레코드로 하자’며 Y 씨와 관련된 인간적인 섭섭함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기자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럴 분은 아닌데…”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최소한의 신뢰는 남아있는 듯 보였다.
계속되는 질문에 신 씨는 “그간 Y 씨가 ‘나를 위한다면 그만 덮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문자 메시지를 수차례 보내왔으며 만남도 요구했지만 거절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Y 씨가 편지조작과 관련된 자신의 주장을 부인한 이유 및 숨겨진 내막에 대해서는 섣부른 추측 및 언급을 꺼렸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나를 속였다 해서 제3자에게 일일이 말할 수 있겠나. ‘의절’은 할지언정 자식된 도리는 지키지 않겠나. 나도 마찬가지다. Y 씨와 완전히 틀어진 현재 상황도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이다. 돈 문제부터 여러 가지 얽힌 것이 많지만 일일이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특히 나를 편지대필을 빌미로 ‘윗선’에게 돈이나 뜯어내려는 구차한 인간으로 몰아간다면 모든 정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다 밝힐 수밖에 없다. 자식이라 해도 아버지를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진실을 알리는 것과 도리를 지키는 것은 다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