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빈 오록 교수 |
시 한 수가 지은이와 우리말로 해석한 이, 영어로 번역한 이, 그리고 감수한 이, 일단 네 사람의 공동 작업이다. 지은이들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사람들. 수록된 시의 작자 중 제일 연장자가 고려 문종 시대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신라 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박인량인데 생몰연대 중 몰만 1096년으로 전해진다.가장 최근의 시인은 조선조 말의 학자이자 우국지사, 저 유명한 매천 황현 선생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던 해에 세상을 뜬 20세기 초입의 인물이니 시집의 시들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1000년의 세월을 내려오다가 다시 100년을 격해 한자 위에 우리말과 영어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난 것. 허난설헌의 시를 소개한다.
영롱화영복요기(玲瓏花影覆瑤棋) / 일오송음화자지(日午松陰花子遲) / 계반백룡신도득(溪畔白龍新賭得) / 석양기출향천지(夕陽騎出向天池)
영롱한 꽃 그림자 옥(玉) 바둑돌을 하나하나 덮어가니
한낮의 솔 그늘 아래 쉬엄쉬엄 놓는 바둑알 꽃과 같아라
시냇가 백룡을 내기로 새로 얻었더니
저녁노을이 그 백룡을 타고 바다로 날아가네
Brilliant flower shadows cover the jade baduk stones one by one.
At midday baduk flowers fall in the shadow of the pine.
I wager the white dragon that lives in the stream.
If I win, I’ll fly to heaven’s pond in the setting sun.
한자와 우리말과 영어를 대조해 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 허난설헌의 시를 소개한 것은 홍일점의 작품이라는 이유 외에 내용이 다른 시들과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시는, 바둑 얘기는 있지만, 바둑 자체를 노래하거나 천착하거나 찬양한 것은 거의 없다. 50편의 시를 통해 바둑은 대개, 거의 일관되게 속절없는 시간과 덧없는 인생을 그리는 알레고리 혹은 선문답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 난가 설화의 변주곡들이라고나 할까.
시집 속에서 허난설헌의 시가 반짝인다면, 시집 출간에서는 번역을 감수한 케빈 오록(Kevin O’Rourke·71) 교수가 이채를 띤다.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이다. 섬의 동쪽 바닷가, 수도 더불린에서 남쪽으로 곧장 120㎞쯤 떨어진 곳, 북위 52도 조금 위에 있는 조그만 어촌 로슬레어(Rosslare)가 고향이다. 한국에 온 것은 1964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우리말과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이 깊어져 한국 고대문학으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외국인 국문학 박사’ 제1호였다.
원래 문학을 좋아했느냐고 묻자 어깨를 펴며 청년처럼 씩씩하게 대답한다. “아일랜드 생산품 중 최고는 문학이다.” 자랑할 만하다. 조너선 스위프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존 밀링턴 싱, 제임스 조이스, 버나드 쇼 같은 세계적인 명성의 작가들이 아일랜드 사람이다.
우리말과 한문이 능통해진 그에게 번역은 자연스런 경로였다. 번역을 하면서, 현대인의 페이소스를, 요즘말로 하면 쉽고 쿨한 도시적 감수성의 언어로 노래해 수많은 독자를 거느렸던 조병화 시인(2003년 작고)을 알게 되었고, 당시 경희대 문리대 학장이던 조 시인의 주선으로 1977년부터 경희대 영문과 교수가 되어 30년 가까이 강의하다가 얼마 전에 은퇴했다.
한국 생활 이제 47년째. 한국식 이름은 조병화 시인이 지어 준 오록(吳鹿). “오랑캐와 사슴, 거침과 부드러움, 야만과 문명, 그런 것들의 조화다…^^” 꿈보다 해몽이다. 번역서 20여 권. 고대문학과 현대문학, 모든 장르를 망라해 한국작품 영어 번역의 독보적 입지를 굳히며 대한민국 문예진흥원상, 미국 코넬대학 문학상, 동서문학상 등 번역 부문의 굵직한 상을 여럿 받았다.
시집을 펴낸 ‘현자의돌’ 출판사 김유선 대표(48)는 “조만간 2편이 나온다. 바둑 한시는 몇 천 수가 있어 2편이 아니라 20편 이상도 낼 수 있다”고 의욕을 보인다. 얼마나 팔릴 것 같으냐고 묻자 김 대표 대신 케빈 교수가 “10만 부!” 하고는 껄껄 웃는다. 정말이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바둑을 사랑하는 강호 제현,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의 관계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바둑을 동경하는 서양 바둑 벗들에게는 이만 한 선물도 없을 것이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