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게릭병에 걸린 아버지가 숨지자 죽음을 선택한 딸. 그 딸이 남긴 일기장엔 어딜 가든 뭘 하든 아버지 생각 때문에 슬프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
루게릭의 경우 회복될 확률이 10%에 지나지 않는 데다 하루하루 신체와 내장 근육, 신경세포가 소멸해 가다 보니 곁에서 24시간 그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B 씨는 깊은 시름을 떨칠 수 없었다.
2008년 11월 아버지 A 씨는 급기야 스스로 음식물을 소화할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됐다. 병세가 악화된 A 씨는 결국 모 대학병원에서 위루술(배에 구멍을 뚫고 관을 통해 음식물을 위에 직접 투입시키는 수술)을 받게 됐다. 이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A 씨는 집으로 돌아와 칼로 손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고, 이를 말리는 두 딸들과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B 씨는 일기를 써 비통한 심경을 담았다. “아빠가 베란다에서 밀어달라고 했다. 언니랑 나랑 울면서 안 된다고 말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아빠랑 둘이 있을 때 (아빠는) 네가 결정을 내려줘야 된다고, 보내달라고 했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지금 당장 보내주진 못해도 혼자 보내지 않고 꼭 함께 가겠다고 다짐했다.”
한 달 후 A 씨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게 됐다. 그러나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병원비를 얻기 위해 살던 집을 팔고 돈을 다 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두 딸을 걱정해서였다.
루게릭의 그림자가 대뇌신경을 손상시켜 간호가 더욱 힘들어졌을 무렵 B 씨는 아버지와 잦은 갈등을 빚었고, 이에 대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 대뇌신경이 손상돼서 감정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화를 이상하리만큼 잘 내고 심하게 웃고 툭하면 울었다. 아빠한테 화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도 잘 못 알아듣겠고, 밤낮으로 시달리다보니 계속 아빠한테 화내고 꼬집고 그렇게까지 변해버렸다. 밤새 깨고 한잠도 못자 아침에 아빠한테 짜증내고 씩씩거리고 얼굴까지 빨개져 아빨 노려보곤 했다. 그때 아빠 폰으로 아빠 친구가 자살해 숨졌다는 문자가 왔고, 아빠한테 말해주자 아빠가 ‘으앙’하고 아기처럼 울었다. 나는 씩씩 거리다 아빠가 우는 걸 보면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이성을 잃고 찾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다.”
3년을 꼬박 아버지 곁에서만 있어야 했던 B 씨. 몇 년 만의 외출로 인해 얻은 기쁨과 그 행복조차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책감으로 변하고야마는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기도 했다. “언니가 오랜만에 일을 쉬어서 외출할 수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밖에 나왔다. 친구 두 명과 다대포해수욕장 음악분수대 쇼를 보러갔다. 분수쇼랑 음악이랑 조명이랑 좋았는데 보다가 아빠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이 음악 분수대가 만들어지기 전엔 아빠 병 초기라서 이 해수욕장에 매일같이 왔었는데 분수대 생기고 나선 아빠가 완전히 누워서 올 수가 없었다. 분수대 보면 참 좋아하겠다.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보여줄 수가 없다. 친구 몰래 꽤 많은 눈물을 쏟았다. 항상 이렇다. 난 어딜 가든, 뭘 하든, 뭘 원하든 늘 이렇게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사는 동안 무엇을 하든 슬프다.”
B 씨의 일기장에는 병든 아버지를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뺏긴 상실감도 묻어났다. “조그맣더라도 내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 번도 내 공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아빠 침대 밑에 요를 깔고 잔다. 깨지 않고 푹 자고 싶다. 한 시간마다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깨고 소변 받고 앉혀서 반대쪽으로 눕히고 밤새 시달리지 않고 아침까지 편하게 자봤으면…” “마음 편하게 맛있는 거, 좋은 거 먹고 싶다. 아빠가 깨 있을 때 옆에서 먹으면 먹고 싶어 하는데 먹을 수 없으니까 미안하고 냄새나는 음식 먹기가 그래서 항상 아빠가 잠들면 급하게 먹고 12시에 아침 먹고, 밤 10시에 잠이 들면 그때 또 밥을 먹는다. 목욕할 때도 아빠가 잘 때 하니까 물 한 번 뿌리고, 아빠가 깨진 않았는지 나와서 확인하고 항상 조마조마하고 슈퍼 갈 때도 뛰어서 쫓기듯 왔다갔다…. 난 정말 평범한 것들을 죽도록 소망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소망하는 걸 너무도 당연하게 쉽게 누리고 있다.”
거동이 불가능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 아버지를 여린 팔로 항시 씻기고 옮기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B 씨의 건강에도 무리가 갔지만 치료받을 여유조차 없었다. “손이 아프고 이상해서 병원에 갔는데 수근관증후군이라고 했다. 손을 많이 써서 생긴 병이라고 수술하고 한 달 정도 깁스하면 괜찮다고 했는데 수술을 할 수가 없으니 방치하고 놔뒀다. 병원에 치료하러 갈 수도 없고 아픈데도 참아야 했다. 심할 때 젓가락질도 가위질도 못 할 만큼 아프고 힘이 없었는데 아빠한테 말할 수도 없고, 밤에 잠들기 전엔 손목 잡고 끙끙 앓았다.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할까. 견딜 만큼 고통 준다는 거 거짓말이다. 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어야 한다. 죽으라고 이렇게 자꾸 벼랑 끝으로 모는 거겠지.”
일기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B 씨의 힘겨움은 그 농도가 짙어졌다. 결국 일기는 아버지 A 씨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B 씨는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확인한 직후부턴 누군가에게 고해성사하듯 존댓말로 일기를 기술했다.
“아빠가 갑자기 숨을 거칠게 쉬더니 이빨이 갈리면서 이상했고, 이빨이 부러지고 피가 나면서 난 왜 그런지 몰라서 설마 자살하려고 한 건지 병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몇 분 안 돼서 얼굴이 노래지고 숨을 안 쉬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될 줄은…. 아빠가 전에 죽여 달라고 할 때 같이 죽을 걸 용기가 없어서 죽여주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죽으려고 살았는데 요 며칠 잠도 못자고 힘들게 해서 아빠한테 짜증내고 욕하고 꼬집고 오늘도 그랬는데 갑자기 이렇게 아빠가 이제 편해지게 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지만 내가 정말 미워해서 오늘 꼬집고 밉게 군 건 아닌데 사과하고 풀릴 틈도 없이 이렇게 갈 줄은…. 아빠를 정말 수십 가지 감정으로 사랑하는구나라고 깨달았을 때 꼭 같이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몇 장의 빈 백지를 넘기자 유언장이 등장했다. 왜 자신이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정갈한 글씨체로 기록했다. 노트에는 눈물자국이 여러 군데 떨어져 글씨가 번져 있었다.
“3년 넘게 아빠 간병하면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아빠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도 느끼고, 좋을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엄마의 마음, 애인 같을 때도 있었고 밥 먹이고 씻기고 똥오줌 받으면서 정말 여러 가지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아빠가 있어도 없어도 어차피 저는 살 수 없습니다. 아빠 없이 딱 하루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 어떻게 아빠 없이 웃고 먹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환경에서 부모에 대한 상처 없이 좋은 배우자 만났으면…. 배우자 복도 없고 힘들게 일하고 딸들 커서 편해지려니까 루게릭병 걸려서 지금까지 죽으려고 산 거, 나 때문에 산 거, 불쌍하고 다음에 꼭 고생하지 말고 편했으면 이제 나도 아빠한테 죄 그만 짓고 편해질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아빠와 함께 갈 수 있게 돼서 다행입니다.”
B 씨는 이 유언을 끝으로 방문에 박힌 못에 노끈을 매달아 목을 맸다. 죽는 순간에도 B 씨는 아버지 병상이 있는 방에서 그를 바라보며 숨졌다. 하루만 아버지 없이 살아보고 싶다는 꿈은, 그렇게 결국 하루도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지극한 효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