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지영준은 이번 사건으로 심한 마음 고생을 했다. 연합뉴스 |
지난 6월 16일 의혹이 제기되며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을 앞두고 한국 육상계를 뒤흔들었던 마라톤 약물 파문은 23일 경찰의 내사 종결 발표와 함께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제법 큰 생채기를 남겼다. 정만화 감독은 소속팀 해체 등의 구설에 시달렸고, 한국 마라톤의 간판 지영준(30·코오롱)도 마음 고생이 심했다. 또 정 감독에 따르면 여자마라톤 국가대표인 이선영(27·SH공사)은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등 세계선수권 출전이 불투명한 상태다. 세계 3대 스포츠 제전으로 불리는 세계육상선수권의 주최국에서 어떻게 경찰까지 포함된 이런 황당한 파문이 발생했는지 그 내막을 <일요신문>이 살펴봤다.
#파문 만든 사람은 제보자
스포츠에서, 아니 육상에서 금지약물과 도핑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초종목인 육상에서 1980년대는 ‘약물의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1960년대 이후 냉전이 심화되며 스포츠에서 동서갈등이 심해졌고, 구 소련과 동독 등에서는 ‘자본주의 선수’들을 이기기 위해 조직적인 금지약물 복용이 횡행했다. 얼마나 약물복용이 심했는지는 육상의 종목별 세계 기록 가운데 마라톤과 100m를 제외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작성됐고, 지금까지 난공불락으로 남아있는 것이 많다. 요즘에는 2000년 이후 세계기록이나 시즌 최고기록 등으로 기록의 가치를 평가할 정도로 당시 약물이 만든 기록은 지금까지도 오욕으로 남아 있다. 이후 약물복용에 대한 숱한 부작용이 보고되면서 국제육상경기연맹(IAAF)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이 약물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A급 국제대회에서 도핑테스트는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아마추어를 넘어 미국 메이저리그와 PGA까지 도핑테스트는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인 까닭에 아마추어 기록종목인 육상에서 금지약물 복용은 선수생명을 걸지 않으면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 됐다. 지영준이나 이선영과 같은 톱랭커는 도핑테스트를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등 스포츠과학 선진국에서는 도핑테스트에 걸리지 않는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기술’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건 상 실현하기 힘든 일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서상택 홍보이사는 “말이 쉽지 약물복용으로 성적을 낸다는 것은 스포츠과학이 발전한 요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파문은 강원지방경찰청의 마약수사대가 제보를 받아 수사에 착수하면서 불거졌다. 정만화 감독의 지도를 받은 지영준 이선영 등 선수 19명과 충북 제천의 재활병원을 상대로 내사를 벌였다. 정 감독의 지도를 받은 지영준 이선영이 빼어난 성적을 낸 것은 물론 상지여고 선수들이 국내 여고 장거리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최고의 성적을 낸 바 있다. 구체적인 혐의는 이들이 일명 ‘마라톤 뽕’으로 불리는 조혈제(造血劑)를 투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사 과정에서 언론보도가 나왔고, 큰 파문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특히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몇 안 되는 한국의 메달 후보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지영준 이선영이 포함된 까닭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경찰은 조혈제 샘플과 처방내역 등의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고, 선수들이 투약한 약물에 적혈구 생성 자극제로 사용이 금지된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이나 다베포이에틴(dEPO) 등이 포함됐는지 여부도 밝히지 못했다. 경찰이 병원에서 압수한 철분제가 금지약물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참고인 조사에서도 결정적인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6월 23일 혐의없음 및 내사종결을 발표하게 됐다.
#그 제보자는 육상인 추정
▲ 2009 중앙서울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이선영. 이번 사건으로 은퇴까지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정만화 감독은 23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은 현행 법규 상 제보자의 신원은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안타깝다. 무고죄를 걸고 싶어도 법률 상 힘들다. 또 경찰은 제보가 들어오면 위법 여부를 판단한 후 수사 착수 여부를 가늠하는데 이는 경찰의 고유 권한으로 따질 수도 없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하지 않았냐고 세게 얻어맞았지만 나중에 무죄로 나오자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확실한 것은 금지약물과 도핑 등은 아주 전문적인 일로 육상계 내부 외에는 제보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육상경기연맹, 실업팀 등을 취재한 결과 지난 수년간 ‘정만화 사단’이 경이적인 성적을 내자 이에 대한 시기심이 크게 확산된 것으로 파악됐다. 금지약물 복용설도 이미 육상계 내부에서는 ‘설’로 여러 차례 나돈 바 있었다.
특히 지난 5월 말 명문 실업팀인 코오롱마라톤팀의 사령탑 자리가 공석이 되자 정만화 감독의 코오롱 행이 육상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런 차에 정 감독을 시기하는 고교 혹은 실업의 육상인이 경찰에 제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만화 감독은 “(내가) 코오롱 감독으로 간다는 얘기도 참 황당하다. 후임 감독을 물색 중인 코오롱으로부터 구체적인 영입제의를 받은 적이 없다. 전화가 왔길래 다른 지도자를 내가 추천한 적만 있을 뿐이다. 사립고등학교(상지여고)가 어려운 여건 가운데 비인기종목에 큰 지원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학교와 사전 상의 없이 실업팀으로 무작정 옮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소문으로도 개인적으로 크게 곤란함을 겪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번 파문으로 인해 현재 정 감독의 코오롱 행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가 됐다. 오히려 상지여고 재단 측에서 ‘육상팀 해체’라는 극단적인 얘기가 나왔다. 경찰에서 혐의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지를 크게 구긴 까닭에 돌이킬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정 감독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우리가 원주공설운동장에서 훈련을 할 때 많은 시민들을 만나곤 한다. 예전에는 격려들을 참 많이 해주셨는데 약물파문이 보도된 후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말을 거는 사람도 없어졌다. 지도자인 내가 이럴 정도인데 선수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은 얼마나 크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대한육상경기연맹은 대구 세계선수권 이후 제보자를 밝혀내 정만화 감독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내사 중인 사건이 언론보도를 타게 된 것에 대해서도 정만화 감독은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경찰 수사가 무혐의로 끝날 가능성이 높자 제보자가 언론에 이를 흘려 자극적인 기사를 유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찰에 항의했는데, 경찰에서는 언론에 흘린 적이 없고 언론으로부터 취재전화가 와 ‘내사 중인 것은 맞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른 루트를 통해 언론으로 알려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파장은 보다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남자마라톤의 간판스타인 지영준은 원주에서 정만화 감독과 함께 생활하는 까닭에 파문기간을 잘 이겨냈지만 이선영의 경우 여자대표팀에서 훈련을 하며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구세계선수권대회 포기 및 은퇴 등 극단적인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지영준은 “황당하고, 힘들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잘못한 일을 한 적이 없다. 큰일을 앞두고 자칫 육상계의 공멸을 가져올 수 있는 거짓선동으로 일삼는 우리 육상계의 풍토가 안타깝기만 하다. 일단 세계대회가 코앞인 만큼 운동에 전념하고, 기록과 성적으로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