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회장 | ||
지난해 정 회장은 직접 나서 한보철강 인수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정 회장 자신이 직접 입찰 가격(9천1백억원)을 결정했을 정도로 철강사업에 보인 관심과 애착이 대단했다. 이후 당진 공장의 원자재 조달과 기술협력 문제 논의를 위해 직접 일본을 수차례 방문하는 등 철강사업에 대한 각별한 정성을 보이고 있다.
제철 사업이 성공하면 현대차그룹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 이후 내놓았던 재계 넘버원 자리를 되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큰 사업이다. 중국의 제철사업이 확대일로에 있는 데다 세계적인 고로업체인 포스코의 견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 회장이 고로 제철소 건설에 나선 배경엔 이 사업이 선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숙원이었다는 점도 있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경남 하동에 제철소 부지를 선정하는 등 철강업계 진출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특히 용광로 건설은 정 명예회장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지난 92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패배에 따른 정치적 후유증과 97년의 외환위기 사태, 그리고 2001년 정 명예회장의 사망과 그룹 분리의 진통을 겪으며 현대의 철강업계 진출 야심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를 정몽구 회장이 다시 꺼내든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선친 유업을 계승한다는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업 확장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고로 건설은 약 2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과 기술, 인력이 들어간다. 공장 완공 이후에도 운영 노하우와 자재 조달 등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고로 완공 시점으로 예상되는 2010년까지 단기적 손해를 감당할 만큼 현대차가 넉넉하게 경영실적을 올릴 수 있는가도 관심사다.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는 유동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한보철강이 무너진 이유도 결국은 공장 가동이 정상화될 때까지의 유동성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정몽구 회장이 초기 투자에서의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고 고로 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순수하게 선친 유업 계승 차원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기존 제철업계를 주무르고 있는 포스코를 향한 정 회장의 경쟁의식이 제철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주목을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01년 자동차 냉연강판 공급문제로 포스코와 심각한 갈등 끝에 법정분쟁까지 벌이기도 했다. 포스코가 자동차 생산에 없어서는 안될 냉연강판의 가격과 물량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해 정 회장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는 정 회장으로 하여금 냉연강판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고로 건설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그룹의 미래 수익원을 개발하는 측면도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당시 포스코와) 갈등이 아주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감정 갖고 사업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전문그룹으로서 필요한 자재를 자급자족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국내 철강시장을 평정하고 있는 포스코와의 경쟁에 대해 현대차 고로사업 주무업체인 INI스틸측은 “우리에겐 현대차와 기아차라는 확실한 수요처가 있다”며 사업리스크가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010년까지 자동차 5백만 대 생산체제를 목표로 하는 현대차에 물량공급만 해도 안정적 수익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범 현대가인 현대중공업 계열사에서의 철강 수요도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현대·기아차가 소비하는 철강 자재의 40% 이상을 납품하던 포스코측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포스코측 관계자는 “현대차 고로 사업의 구체적 계획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다”면서도 “현대차가 수입 물량을 대체할 자재 생산에 주력하게 되면 우리가 (현대차에) 계속 공급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포스코측 관계자는 “같은 업종에 참여하는 두 업체가 상생해서 서로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다. 지금의 철강업계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무대를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내 업체간 경쟁구도는 무의미하다”고 밝혔다. 현대차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 회장이 표출해온 철강사업에 대한 의지를 볼 때 포스코가 공급하던 물량을 대체하기 위해 고로 사업에 진출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예상대로라면 현대차의 고로 완공 시점으로 보이는 2010년 전후로 포스코는 거대 수요처를 잃는 셈이다.
포스코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차의 고로 사업 진출 청사진은 장밋빛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호황을 맞은 철강업계가 향후 현대차의 고로 완성 이후 국내·외 시장의 공급과잉 사태로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면 현대차그룹 전체에 재앙이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현대차가 고로 완공 시점까지 막대한 투자비를 확보해낼 수 있을지, 포스코의 협조 없이 운영 노하우나 경쟁력 있는 고로 건설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에 대해 포스코가 어떤 대응책을 세울 지에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