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 사모펀드를 내세워 세계적 골프업체 ‘아큐시네트’를 인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진은 아큐시네트 인수를 위한 금융계약 체결 서명식에 참석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강만수 산은 회장, 윤윤수 필라코리아 회장(왼쪽부터). 연합뉴스 |
지난 2008년 금융위기로 충격을 받았던 주식시장은 2010년 들어 위기 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하지만 2008년 이전 존재했던 미래에셋의 펀드제국은 옛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시중에 자금은 넘쳐났지만, 예전 같으면 펀드로 들어와야 할 돈이 삼성증권이 주도하는 자문형랩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2007년 미래에셋 설립 10년 만에 내놓은 야심작 ‘인사이트 펀드’의 부진도 치명적이었다.
반면 금융위기 전만 해도 뚜렷한 색깔을 찾지 못해 ‘어중간’했던 삼성증권은 위탁매매의 최고봉인 대우증권을 제치며 대약진에 성공한다. 초고액 자산가시장을 집중 공략한 자문형랩이 증시의 대세가 되며 기선을 완전히 제압한 덕분이다. 미래에셋이 금융위기 전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한 공모펀드로 시장을 제압했다면, 삼성증권은 금융위기 후 돈 많은 부자들을 집중 공략한 셈이다. 국내 자문형랩 시장은 10조 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절반이 삼성증권을 통해 판매됐다.
미래에셋은 다급해졌다. 어렵게 잡은 자본시장의 주도권을 삼성에 힘없이 내주게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내내 펀드 환매에 대응하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올 들어 환매가 진정되면서 삼성의 독주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첫 반격은 삼성증권을 직접 겨냥했다. 올 2월 박현주 회장이 “자문형랩 수수료가 너무 비싸다”며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수수료 인하를 단행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이에 동참했다. 하지만 삼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은 “인하할 생각이 없다”면서 “지금은 수수료 경쟁을 할 때가 아니라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데 치중할 때”라고 맞받아쳤다.
삼성의 자랑인 초고액 자산가들은 수수료에 민감하지 않은 데다, 이미 1년 전부터 자문형랩에 투자해 상당한 투자수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내부에서는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의 높은 수수료를 거론하며 적반하장이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미래에셋은 4월 다시 재공격에 나섰다. 이번엔 ETF(상장지수펀드)였다. ETF는 시장 또는 비슷한 업종이나 성격의 주식을 묶어 이를 마치 하나의 지수처럼 투자하는 상품으로 인덱스 펀드와 비슷하다. 하지만 거래비용이 낮고 환금성이 좋아 선진국일수록 발달하는 상품이다. 이 부문 절대강자는 처음 ETF를 도입한 삼성자산운용이다. 미래에셋은 4월 ETF 보수 인하를 선언하며 삼성운용에 도전장을 냈다. 잇따른 상품 출시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32개 ETF를 거래소에 상장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많이 따라붙었지만 우리자산운용을 제치고 2위에 올랐을 뿐이다. 여전히 1위 삼성과의 격차는 크다.
미래에셋맵스의 ETF 순자산은 1조 원을 조금 넘어, 4조 원대인 삼성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 7월 25일 금융투자협회 집계에서 삼성자산운용의 순자산이 34조 6781억 원으로 미래에셋운용(33조 2637억 원)을 앞섰을 때도 결정적 역할은 ETF였다. 삼성운용은 자체적으로 ETF를 운용하지만, 미래에셋운용은 계열사인 미래에셋맵스운용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기준 미래에셋맵스와 해외법인을 포함한 미래에셋자산운용그룹의 순자산 총액은 45조 3721억 원으로 삼성운용보다 10조 원 이상 많다.
미래에셋은 시장 초과 수익률을 추구하는 미래에셋자산운용과, 시장수익률 또는 절대수익률만을 추구하는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을 별도로 두고 있다. 또 홍콩 인도 등 해외 법인들 역시 해당 시장에서 펀드 운용과 판매를 모두 수행하는 기능을 가질 정도로 독립적이다. 이들 운용그룹은 박현주 회장이 총괄한다.
삼성과의 대결에서 시원치 못한 성적을 거둔 미래에셋은 지난 5월 ‘타이틀리스트’로 유명한 세계적 골프용품업체 아큐시네트를 전격 인수한다. 필라코리아 국민연금의 자금을 바탕으로 미래에셋 사모펀드가 인수하는 형태다. 박현주 회장은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10년 글로벌 경영을 공식 선언한 이후 해외법인을 설립한 적은 있지만, 대형 M&A(인수·합병) 성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였다.
사모펀드를 운용하지 않는 삼성으로서는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박 회장은 뒤이어 캐나다 중견 자산운용사를 인수해 선진시장에 사업교두보를 마련했다. 두 차례의 굵직한 M&A로 오너 박 회장의 체면은 상당부분 회복이 됐다. 그런데 27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다시 한 번 미래에셋의 기(氣)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개정안의 최대 핵심은 자기자본 3조 원이 넘는 증권사에 한해 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 사실상 은행의 기능 상당부분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증권사들에게 상당한 사업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미래에셋증권의 자기자본은 채 2조 원이 되지 않는다. 삼성증권은 굳이 삼성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년 초쯤이면 3조 원을 넘을 게 확실시된다. 미래에셋으로서는 증자라도 해야 하는데, 얼마 전 미래에셋생명 증자를 한 탓에 여력이 부족하다. 상당한 폭의 주가하락을 감수하고 유상증자를 할 처지도 아니다. 박 회장으로서는 은행 재벌 등 기존 기득권 세력들과의 경쟁에서 힘의 열세를 다시금 절감하게 된 셈이다.
자본시장에서는 삼성과 미래에셋의 대결에서 삼성의 절대우세를 점친다. 박준현 사장이 그룹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데다, 최근 금융부문에서의 수익성 강화가 그룹의 주요한 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시장에서의 순위 변동은 제조업과 달리 잦은 데다, 맨손에서 대한민국 간판 금융그룹을 일군 박현주 회장의 저력을 평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삼성 금융부문에서 가장 취약한 해외부문에서는 아직 미래에셋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M&A부문에서는 오너가 직접 사업을 전개하는 미래에셋 쪽에 의사결정 과정상 좀 더 경쟁력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문에 삼성과 미래에셋이 자본시장에서 펼칠 대결의 승부는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금융투자업은 비교적 소비자중심 산업이라는 점에서, 두 기업이 각각 ‘삼성공화국’, ‘인사이트 펀드’로 상징되는 국민들 의식 속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될 전망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