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월 탈옥한 뒤 전국을 누비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은 2년 6개월여간의 도피생활 끝에 1999년 7월 검거됐다. 12년간 독방생활을 착실히 해오던 그가 자살을 기도해 궁금증을 낳고 있다. 사진제공=국제신문 |
탈옥수 신창원(44)의 근황을 물어볼 때마다 교도소 관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옴짝거리기만 해도 뉴스가 되는 요주의 인물이다 보니 교도소 측에서는 그와 관련된 취재에 여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아예 뉴스에 오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하던 신 씨가 또다시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이번에는 자살을 기도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 것일까.
경북 북부 제1교도소에 따르면 신 씨는 8월 18일 새벽 4시 10분께 9동 하층에 있는 4.09㎡ 독방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고무장갑을 목에 매고 신음하고 있던 신 씨가 교도관에게 발견돼 안동병원으로 후송, 응급치료를 받았다. 자살기도에 사용한 고무장갑은 지난 1월 빨래나 설거지 등을 하기 위해 신 씨가 교도소에서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 씨가 수용됐던 독방에서는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자필 메모가 발견됐지만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2년 6개월간 신출귀몰한 탈주행각을 벌여 수많은 경찰의 옷을 벗겼던 신 씨는 재수감된 후 의외로 큰 소동 없이 얌전히 생활해왔지만 그의 수감생활은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초에는 신 씨가 빙의증상을 보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교도소 측에서는 부인했지만 신 씨는 접견을 온 이에게 “감방에 있으면 목에 시커먼 밧줄 자국이 나 있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난다. 어떤 때는 그 사람들이 벽에서 나와 목을 조른다. 너무 겁이 나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겠다고 호소했다”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얘기가 전해지며 그의 신병에 대한 루머들이 떠돌았다.
하지만 2004년 신 씨는 고입 및 고졸 검정고시에 잇달아 합격하는 등 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는 흐뭇한 소식이 들렸다. “무기수가 공부는 해서 뭐하냐”는 일각의 비아냥에도 그는 대학에 진학해 학위를 취득하겠다는 목표를 밝혀 감동을 안겨줬고, 그로 인해 일부 수용자들 사이에서는 검정고시 열풍이 불기도 했다.
2008년에는 본인 동의 없이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가 촬영된다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할 의지를 피력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담은 영화제작을 위해 여러 영화사와 유의미한 접촉을 하기도 했다. 신 씨는 또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의료소송과 서신수수 불허처분에 대한 손해배상소송 등 4건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소송배경에 대해 ‘수용자들의 인권개선’이라고 말한 신 씨는 대법원으로부터 일부 승소판결을 이끌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수감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로 심심찮게 뉴스메이커에 올랐던 신 씨였지만 최근에는 이렇다 할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재소자 인권’과 관련된 줄소송으로 교도소 측의 속을 까맣게 태우던 것도 멈췄다. 지난해 6월에는 흉악범만 수용된 중경비 시설인 경북 북부 제2교도소에서 일반경비시설인 경북 북부 제1교도소로 이감되는 호재까지 있었다. 모범적인 생활을 해 온 점이 고려됐다는 것이 교도소 측의 설명이다.
따라서 이번 그의 자살기도 소식은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수용자 인권처우 개선 등 사회 부조리와 싸우며 다양한 방법으로 바깥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그가 삶의 끈을 놓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교도소 측에서는 신병비관에 의한 우발적 자살기도로 보고 있다. 유서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숨 막히는 탈주기간 중에도 장편의 수기를 남겼던 그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면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신 씨는 서신이나 메모를 통해 지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을 솔직담백하게 전달하는 것을 즐겨왔다. 신 씨가 서신불허건과 관련해 소송까지 불사한 것도 서신이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라 여겼기 때문이다. 서신을 보낼 때도 그는 매번 논리정연하고 정확한 문장력으로 기자를 여러 번 놀라게 하곤 했다. 행정소송 당시에도 매뉴얼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소장을 직접 작성할 정도였다. 또 신 씨는 오랜 수감생활 중에도 가까이 지내는 아우에게 서신을 보내 안부를 전하고 따뜻한 조언을 잃지 않는 등 측근들과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우발적 자살 기도가 아니라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자신의 삶에 대해 회한까진 아니더라도 자살 동기 및 가까이 지내던 측근에게 전하는 말 정도는 남기는 게 당연해 보인다.
약 한 달 전 신 씨의 부친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우발행동 쪽으로 무게를 싣게 한다. 신 씨는 부친의 사망으로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 씨의 지인에 따르면 신 씨의 부친(88)은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받았는데 몇 해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부친은 지난달 19일 협심증과 장염 증세로 병원으로 후송된 뒤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다음날 오전 사망했다. 신 씨는 20일 늦게 부친의 사망통보를 받았으나 ‘특별귀휴’는 이뤄지지 못했다. 신 씨는 “나가서 아버지의 상을 치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신 씨는 방황과 잦은 수감생활로 ‘착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부친에 대한 깊고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측근이 면회를 올 때마다 자신으로 인해 엄청난 마음고생을 한 부친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고령에 홀로 생활하고 있는 것에 대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친 역시 마찬가지였다. 15세 때 수박을 훔친 신 씨를 경찰서로 끌고 갔던 부친은 “내가 자식인생 망쳤다. 내가 너무 고지식했던 탓이다”며 평생을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법이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소년원을 다녀온 신 씨는 이후 범죄에 눈을 뜨며 빗나갔기 때문이다. 애끓는 부정을 보여 온 부친은 신 씨의 학사고시(대학졸업자격 제도)를 독려한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했다. 신 씨는 지인들에게 “고향과 가까운 교도소로 이감돼서 면회 오시는 아버지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피력했다고 한다.
신 씨가 자살을 기도하기 하루 전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또 다른 수용자가 자살했다는 점에 미뤄 신 씨가 이에 동요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우발적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그간 신 씨는 측근들을 통해 적잖은 고충을 토로해왔다. 일단은 건강이 문제였다. 2009년 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신 씨는 극심한 허리통증과 우울증 등을 호소하면서 “이젠 사다리를 줘도 도망갈 수 없는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또 신 씨가 보내온 소견서에는 ‘우울감·두통 등의 신체증상, 불면증, 의욕저하 등을 보이고 있어 3개월간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완치 및 재발방지를 위해 향후 6개월 이상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 신 씨의 수감생활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장기간의 독방생활이었다. 2009년 신 씨는 기자에게 “9년 8개월 동안 징벌 한 번 없이 생활해왔지만 0.8평짜리 독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신체적 질환에 정신적 압박감이 더해져 급기야 우울장애까지 발생했다”며 교도소 측의 독방수용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신 씨는 경북 북부 제2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2008년 9월 28일 급성 췌장염으로 두 차례나 안동병원으로 응급후송될 만큼 중한 상태라 교도소 측에 입병(교도소 병동 수용)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독거실에 계속 있어야만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신 씨가 외부로 보낸 서신을 통해서도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다. 신 씨는 지난해 초 한 전문가에게 “구금된 환경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일으킬 위험이 크다. 정상적인 사람도 장기간 비좁은 거실에 격리수용될 경우 문제가 발생하는데 문제적인 수용자들은 더욱 위험하다. 구금 위주로 만들어진 시설적인 문제, 교도관들과의 사소한 마찰, 특별권력관계와 유사한 형태에서 일방적으로 받는 여러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수용자의 교정교화와 사회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구금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격리하는 방향으로 처우가 진행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서신을 보낸 바 있다. 12년 1개월째 독방에서 생활해온 신 씨는 얼마 전에도 측근에게 “독방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살 것 같다. 이러다 정말 미칠 것 같다”는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의 목표가 좌절된 것과 맞물려 생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렸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실제로 신 씨는 수년 동안 상담심리학과 범죄심리학 전공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법무부 윗선의 편견으로 인해 꿈을 접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또 교도소 내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번번이 한계를 느낀다고도 했다.
실제로 신 씨는 전문가에게 보낸 서신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를 이끌어냈지만 민사소송은 백번 승소를 해도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힘이 많이 빠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 2009년 신창원이 기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당시 그는 편지에서 “한계를 느낀다…지금의 환경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
장기간 수감생활에 대한 회한과 더불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1999년 재검거된 그는 무기징역에 22년 6월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모범수로 생활해서 무기징역이 대폭 감형된다 해도 그가 앞으로 교도소에서 보내야 할 시간은 족히 20년은 넘는다. 현재 40대 중반인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가 환갑 전에 세상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다는 점에서 그가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