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화재배에 출전하는 박영훈 9단과 이창호 9단. 이 9단은 16년 연속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다. |
예선 통과자 가운데 백성호 9단은 시니어조에서, 박지은 9단은 여자조에서 올라왔고, 장주주는 객원기사로 혜택을 받은 케이스. 이들 세 사람과 강동윤 이영구를 빼고는 푸릇푸릇한 신참. 전영규는 1988년생이고 2005년 입단에 단도 5단이니 그다지 신참은 아니라 하더라도 김정현은 1991년생, 2009년 입단으로 현재 3단, 김동호 2단는 1991년생, 강승민 2단은 1994년생, 나현 초단은 1995년생인데 프로기사로는 모두 2010년에 입단한 새내기들이다.
이창호는 예선 탈락의 고배를 들었으나, 이창호가 빠진 세계대회는 상상할 수 없다는 팬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와일드카드를 들고 삼성화재배 창설 이래 16년 개근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중국은 시드배정자 구리 콩지에 박문요에 예선 통과자 천야오예 리저 탄샤오 펑리야오 궈원차오 쑨리 리쉬엔하오 왕타오 송용혜 등 12명. 시드배정자와 여자 시드 송용혜, 예선 통과자 중 천야오예를 뺀 7명은 생소한 얼굴. 중국도 우리와 비슷하게 신예들의 힘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유키 사토시 9단, 사카이 히데유키 8단, 단 2명이다. 유키 1972년생, 초년 시절 ‘관서의 샛별’로 촉망받았으나 이후 세계 일류급에는 올라오지 못했다. 요즘 새로이 힘을 내는지 현재 일본 랭킹 5위 타이틀인 제36기 ‘천원’ 보유자이며, 사카이는 1973년생, 랭킹 7위의 ‘기성(작은 기성)’을 갖고 있다.
이번 삼성화재배에서는 우리 팀에서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이지만, 박영훈 9단의 활약을 기대하며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박영훈은 얼마 전, 중국의 ‘명인’ 타이틀 보유자 장웨이지에 5단(20), 일본의 ‘명인’ 이야마 유타 9단(22)과 어울려 중국 창더시에서 제2회 한-중-일 통합 명인을 놓고 격돌했다. 먼저 박영훈과 이야마가 만나 박영훈이 이겼고, 패자인 이야마는 기다리고 있던 장웨이지에와 두어 또 져 탈락, 8월 20일 박영훈과 장웨이지에가 결승을 벌여 박영훈이 우승을 차지한 것.
한-중-일 명인전은 또 그 전에 있었던 이세돌, 구리, 이야마, 셋이 격돌한 바 있는 한-중-일 최고수 초청전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이때도 박영훈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박영훈은 평소에도 물론 잘 두지만, 특히 단기전이나 이벤트에는 더욱 강한 면모를 보여 왔다는 것이 근거였다. 어쨌거나 통합 명인전 우승으로 새롭게 상승세를 탔으면 하는 바람인데, 박영훈은 8월 25일 현재 삼성화재배 16강 진출을 위해 일본의 사카이 8단과 대국하고 있다.
이미 중-일 명인전, 일-중 천원전, 한-중 천원전 같은 홈앤드어웨이 교류전 방식의 통합우승전은 정기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교류전 초창기에는 일본이 한국은 약하다고 건너뛴 채 주로 중국을 불러냈고, 최근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중국하고만 왔다 갔다 하는 양상이다. 예전에 일본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바둑이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중국의 시장 규모를 고려한 면이 크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스타일, 즉 이벤트성의 소규모 단기간 대항전 혹은 초청전 같은 대회가 점점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자국내 대회보다는 국제대회가 아무래도 더 재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나 한-중-일을 비롯해 미주, 유럽까지 출전하는 세계대회는 이미 있을 만큼 있는 데다가 참가 숫자가 많은 만큼 대회 기간도 좀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고, 대회의 권위나 홍보 효과 면에서는 대회 기간이 긴 것이 좋을지 몰라도, 관전의 즐거움을 기다리는 팬들 중에는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그런 건 좀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중-일 이외의 지역에서 참가하는 기사는 아직까지는 아마추어여서 대회의 구색을 위해 동원되었을 뿐, 실제로는 늘 들러리 역할에 그치고 있는 것도 대회의 긴장감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 한두 판 한-중-일 기사를 이기면 그게 큰 이변으로 잠깐 화제가 되긴 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차세대 기수 박정환 9단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후지쓰배도 올해는 크게 달라진 진행방식을 선보였다. 내리 닷새 동안을, 그것도 중간에 하루쯤 쉬는 날도 없이 바둑을 두어 곧장 끝내 버렸다.
전통을 내세우며 지금도 이틀걸이 바둑으로 권위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본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얘기도 있다. 이번에 대회 기간을 대폭 줄인 것은 시대에 흐름에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지진에 원전사고, 경제난, 그런 바둑 외적 요인 아니면 일본 바둑이 통 성적을 내지 못하므로 세계대회 자체 또는 바둑 자체에 흥미를 거두기 시작한 조짐인 듯하고, 그렇다면 몇 년 전에 ‘도요타 덴소배’가 없어졌듯이 조만간 후지쓰배도 중단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다시 갈림길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우나 고우나 세계바둑에서 일본이 빠지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일본을 빼고 한국과 중국만 어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전에 우리가 좀 약할 때 일본이 우리를 홀대한 것은 있지만, 그때 우리는 바둑 강국을 꿈꾸고 있었기에 홀대에도 불구하고 노력했다. 자강불식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국제교류에서 소외된다면 예전의 우리처럼 그런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세계 바둑의 리더가 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도, 세계보급이 이루어지고 틀이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일본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 중국이 우리를 넘어선다면, 중국이 우리와 일본에 손을 내밀 이유 또한 없어 보이니까.
물론 중국이 앞으로도 단기간에 우리를 추월할 가능성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크지 않다. 후지쓰배 박정환 우승이 말해 주듯, 타이젬 필자로 활약하는 김종서 작가의 표현처럼 ‘한국 바둑은 필요할 때 천재를 탄생시키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 ‘그게 머릿수로 상대가 안 되는 중국에 밀리지 않는 힘’이다. 김종서 작가의 진단이 오래 유효하기를 바란다. 다만 지금까지 제도보다 사람에 의존해 버텨오고 있는 우리 속내가 좀 불안하기는 하다.
이광구 바둑전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