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에서 방출된 이후 부산에 머물며 재활치료 중인 최향남.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롯데와의 인연은 끝났지만 여전히 부산을 떠나지 않고 있는 최향남을 8월 24일, 사직야구장 인근에서 만났다. 그가 매일 오른다는 백양산 등정(?)에 동행하며 자유인 최향남을 인터뷰했다.
―롯데의 웨이버 공시 후 다른 팀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다.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긍정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였다. 나이도 많고, 부상도 당했고, 야구 인생의 막바지에 와 있고…, 이쯤 되면 야구를 접어야 할 시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난 자유로운 신분이다. 날 원하는 팀이 있다면 어떤 제약 조건 없이 그 팀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동안 그 규제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을 때 오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을 떠돌았다. 지금은 내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싶다.
―롯데에서 최향남 선수를 웨이버 공시한 이유가 팔꿈치 부상 때문이었다. 재활을 통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판정을 받게 되자 내보낸 것이다. 지금 팔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다.
▲오래 던지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캐치볼을 하면서 팔꿈치 상태를 체크해 보고 싶은데 내 공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 지금은 산에 오르며 체력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병원으로부터 팔꿈치 수술을 권유받고 사실 갈등이 많았다. 그러나 내 선택은 수술 대신 재활이었다. 2001년 한 차례 어깨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수술 후 짧은 재활 끝에 바로 공을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다시 마운드에서 제대로 된 공을 뿌리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수술 후 감기 몸살을 달고 살았다. 면역력도 약해져 자꾸 몸이 아파왔다. 그래서 수술하는 데 자신이 없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다시 회복해서 복귀한다고 해도 기약이 없는 것 같았다.
―수술하지 않고 재활을 통해 다시 회복할 자신이 있나.
▲아직 정확한 대답을 할 상황이 아니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팔꿈치 상황에 따라 야구를 계속할지, 안 할지, 결정이 될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끝인가?’하는 갈등에 휩싸인다. 신께서 내 능력의 한계치를 계속 시험만 하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내가 다시 야구를 해야 할 운명이라면 팔꿈치 상태가 나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 아직 내 마음에 ‘포기’란 단어가 생기지 않았다. 여전히 내 시선은 마운드에 가 있다. 다시 그 마운드에 서고 싶다.
―팔이 아팠던 건 언제부터였나. 오래 전부터 통증이 있었던 건가.
▲아마 내 기억으로는 스무 살 때부터 팔꿈치가 아팠던 것 같다. 그러다 2001년 어깨수술을 했다. 2003년에 팔꿈치 통증이 느껴져 병원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겨낼 수 있는 통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미국과 일본 독립리그에 있을 때 다시 통증을 느꼈다. 이번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통증이었다. 그래도 참고 던졌다. 그 후 롯데로 다시 오게 되면서 재활을 통해 팔꿈치 부상을 회복시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또 수술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최향남’하면 ‘풍운아’ ‘기인’ ‘돈키호테’ 등등의 수식어가 뒤따른다. 무엇보다 2007년 롯데 입단 후 2년이 지나 다시 미국으로 향한 부분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야구인들도 있다. 그때 롯데와 재계약을 했더라면 FA 이후 거액의 돈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약간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야구를 하는 이유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닌 내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난과 비아냥거림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남의 눈’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인생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 부산 사직동의 뒷산 산책길을 걸으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그때 롯데로 복귀했더라면 4년 동안 보류 선수로 묶여 있어야 했다. 이미 9년을 다 채우고 해외로 나갔는데, 포스팅시스템으로 해외 진출한 선수가 국내로 복귀하면 다시 4년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는다는 규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한국으로 들어와 롯데와 협상을 하며 2011년 해외진출 보장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들어가 독립리그 도쿠시마에서 50여 일간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일본 독립리그는 미국 재도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결국 롯데로 돌아왔다. 롯데로 돌아오기로 결심하면서 마음속에 ‘메이저리그’는 지운 건가.
▲나이가 있다 보니 4년이란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1년 후, 2년 후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4년이란 기간을 얘기한다는 게 우스웠다. 더 이상 꿈을 좇는다는 말로 손가락질받느니, 날 받아주는 팀이 있을 때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엔 부상으로 그 팀에서 방출이 되다시피했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최향남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얻은 것도 있겠지만, 잃은 것 또한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난 이미 어깨 수술 판정을 받았던 2003년에 모든 걸 다 잃었다. 스물한 살에 군 입대했는데, 그때는 ‘군대=은퇴’나 마찬가지였다. 군복무 후에 제대로 야구하기 힘들다는 시선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다시 야구를 했고, 서른 살까지 야구하면 ‘노익장’ 취급을 받거나 은퇴 수순으로 몰고 가던 시대에 난 은퇴가 아닌 미국 야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처음 미국으로 향할 때, 한국에서 해볼 만큼 다 해봤기 때문에 아무 부담도 미련도 없었다. 서른 살 중반의 미국행이 무모한 도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라도 떠날 수 있어 행복했다. 2007년 클리블랜드 트리플A에 있을 때, 2009년 LA다저스 트리플A에 있을 때, 그리고 도미니카와 멕시코, 일본 독립리그까지, 참으로 많은 팀을 옮겨 다녔고,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 하루 16시간의 버스 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미니카에선 마운드에서 빈혈로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간 적이 있었고, 앨버커키에 있을 때는 몸의 면역 체계가 떨어졌는지, 몸이 하루 종일 간지럽고, 약만 먹으면 두통이 심해지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린 적도 있었다. 당시 내 소원이 몸을 긁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숙면을 취하는 거였다. 그래도 나한테는 그 모든 것들이 ‘즐거운 도전’이었다. 그 고통, 고생, 참담한 경험들까지 모두….
―최향남한테 ‘돈’이란?
▲이전에는 돈의 중요함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무적 선수가 되다 보니 돈이 있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봤을 때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2009년 LA다저스 마이너리그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구단 측에서 다음 시즌 스프링캠프 때 메이저리그 초청 선수의 신분을 줬다. 즉 스프링캠프 동안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저스 불펜을 살펴보니까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선수들이 너무 쟁쟁했던 터라 과연 나한테까지 기회가 올까 싶었다.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며 다른 팀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구단 측에서 화가 났는지,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을 없애고 마이너리그 캠프를 제시하더라. 내가 주저하지 않고 계약을 했더라면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구단에서 미안했는지, LA다저스의 대만투어에 날 포함시켜서 감독 앞에서 피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패전처리로 끝을 맺었다. 그 다음부터 난 다시 앨버커키로 가 있어야 했다.
최향남은 자신의 몸이 좋아진다면, 또 다시 꿈을 위해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부산에 머물러 있지만, 산과 바다에서 몸을 만들고 다듬어 마지막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미국이 힘들면 한국에서 입단테스트 받을 각오도 하고 있다. 내 몸이 던질 수 있을 때까지, 그 마지막까지 야구장에 있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부산=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