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전 총리가 추석 직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서울시장 출마 여부 등을 놓고 의견을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핵심 측근인 A 씨가 추석 연휴 직후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정 전 총리는 서울시장 보선이 확정된 이후 줄곧 여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정치와는 무관한 행보를 걷고 있다. 정 전 총리는 2007년 대선정국에서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했지만 불출마를 선언했고, 지난 4월 성남 분당을 보궐선거 때도 여권 지도부가 출마를 권유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18대 총선 과정에선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낀다”며 정치 입문을 거부했다.
여야 정치권의 끈질긴 구애를 수차례 뿌리친 정 전 총리는 2009년 9월 국무총리로 발탁됐고, 2010년 12월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치권과 거리를 두면서 행정경험을 쌓아온 정 전 총리를 두고 정치권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경제학자 출신이면서 ‘야구광’으로 잘 알려진 정 전 총리의 성격과 스타일이 정치와는 맞지 않다는 분석에 힘이 실렸다. 이번 서울시장 보선 정국에서 또다시 유력한 여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정 전 총리의 출마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도 이러한 분석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정 전 총리가 큰 정치를 펼치기 위해 행정경험을 쌓고 중소기업을 대변하면서 중산층 끌어안기 등 중장기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정 전 총리는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은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역설하면서 대기업과 전경련의 인식 전환을 주문하는 등 중소·서민경제 활성화에 매진하고 있다.
서울시장 보선정국에서 인물난에 허덕이고 있는 여권 핵심부가 ‘정운찬 카드’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도 정 전 총리의 큰 정치와 맞닿아 있다. 정 전 총리가 마음 한 구석에 큰 뜻을 품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승부수를 띄울 때가 됐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판단이다. 실제로 여권 핵심부는 서울시장 보선이 확정된 이후 다양한 루트로 정 전 총리와 접촉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결과 청와대와 한나라당 수뇌부는 정 전 총리에게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할 것을 적극 권유했고, 정 전 총리도 서서히 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정 전 총리의 출마설을 기자에게 처음 언급한 A 씨는 “정 전 총리는 추석 연휴 직전에 은밀히 상도동을 방문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회동을 가졌다”며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울시장 출마 여부 등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A 씨는 이어 “이명박 대통령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등 여권 수뇌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히든카드는 정 전 총리일 것이다. 여권 수뇌부의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받은 정 전 총리가 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9월 8일 청와대 상춘재 앞뜰에서 진행된 ‘추석맞이 특별기획-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서울시장을 해 보니 정치와는 직접적 관련이 별로 없다. 행정 일을 해 본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서울시장 후보와 관련한 이 대통령의 복심은 ‘행정 경험이 있는 비 정치인’이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이후 여권에서는 김황식 국무총리,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석연 전 법제처장 등이 이른바 이 대통령이 염두에 두고 있는 서울시장 복심 4인방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 전 총리는 여전히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복심 후보에 포함되지 않았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사석에서 행정경험과 정치력이 있는 인물을 서울시장 후보로 선호한다는 속내를 밝힌 바 있다. 홍 대표는 야권 단일후보가 확정되면 최적의 ‘맞춤형 후보’를 내세워 지지층을 결집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과 홍 대표 등 여권 수뇌부가 승부카드로 준비하고 있는 서울시장 비밀병기는 누구일까. 여권은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원순 변호사로 굳어지고 있는 야권 통합후보에 맞서려면 정치인 출신보다는 행정능력이 검증된 경륜 있는 인사를 후보로 내세우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가 최근 서울지역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2.5%가 서울시장에 적합한 인물로 ‘행정경험이 많은 사람’을 꼽았다. 여권 핵심부가 여권 내 서울시장 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나경원 최고위원보다 경쟁력 있는 외부인사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여권 수뇌부가 복심에 두고 있는 ‘박원순 대항마’로 정 전 총리를 꼽고 있다. 정 전 총리는 앞서 언급한 복심 4인방보다 행정경험이나 인지도가 월등히 앞서있다. 또한 정 전 총리는 서울시장 출마설로 한바탕 정치판을 뒤흔들었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나 야권 통합후보로 급부상한 박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기성 정치에 때묻지 않은 비 정치인이다.
실제로 정 전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여권 내에서 나 최고위원에 이어 지지율 2위를 달리고 있다. 정 전 총리가 줄기차게 ‘정치에 관심 없다’는 뜻을 천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꾸준한 지지율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할 경우 지지율은 수직상승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친박계 또한 ‘정운찬 카드’를 내심 환영하고 있다는 점도 정 전 총리 출마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친박계 주변에서는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나 최고위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될 경우 ‘여성 서울시장- 여성 대통령’ 구도가 짜여져 박 전 대표의 대권가도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친박계 일각에서 ‘나경원 비토론’이 불거졌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친박계 입장에서는 정 전 총리 등 나 최고위원보다 경쟁력 있는 외부인사가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돼 박 전 대표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선될 경우 ‘박근혜 대세론’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야권 통합후보로 박원순 변호사가 확정되고 여권이 맞춤형 후보로 정운찬 전 총리를 내세울 경우 이번 서울시장 보선은 안철수 원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대리전 양상의 대권 전초전 성격을 띠면서 여야간 사활을 건 대혈투의 장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심부가 어떤 비밀병기로 승부수를 띄울지 갈수록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서울시장 보선을 지켜보는 최대 관전 포인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