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표의 대권시계는 여러 이설에도 불구하고 올해 12월쯤부터 작동할 것이라는 게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사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박 전 대표의 그 어떤 비상 시나리오에도 들어있지 않는 돌발변수였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선거다. 특히 나경원 최고위원이 ‘복지 포퓰리즘을 강하게 비난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입장과 동조해 ‘오세훈 아바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선뜻 그녀의 손을 들어줄 계제도 아니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복지정책에 대해 광폭행보를 펼치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가치관이 다른 ‘동지’를 맞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나경원 비토’는 며칠을 가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전이 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경원 최고위원의 지지율을 넘는 인물이 없고, 또 마땅한 외부 인사 카드도 없다는 고민들이 커지면서 당내에 일종의 ‘대세론’이 형성되었기 때문. 결국 유승민 최고위원이 “어떤 계파가 당내후보 견제를 위해 비토한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나경원 최고의 ‘존재’를 처음 인정했다. 친박계는 ‘나경원 대세론’이 굳어지자 나름대로의 손익계산을 끝내고 차선을 통한 대권전략 변경을 감행한 셈이다.
먼저 ‘나경원 효과’의 긍정적인 면부터 살펴보자. 친박계에서는 “박 전 대표가 나 최고위원과 ‘동행’하면서 얻게 되는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기대를 하는 모습이다. 4년 내내 외롭게 여성 대권주자의 길을 걸어온 박 전 대표로서는 신선하고 매력적인 나경원 최고위원을 우군에 끌어들임으로써 훨씬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박 전 대표의 다소 꽉 막혀 보이는 리더십도 나 최고위원이 가세해 유연해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점도 ‘나경원 효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박 전 대표는 그동안 각종 선거 때마다 ‘유력 대권주자가 무책임하게 도와주지도 않는다’는 비판을 들어왔지만 이번에 나 최고위원을 화끈하게 도와줌으로써 그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나경원 효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박 전 대표의 대권시계가 작동하기도 전에 ‘나경원 돌발변수’가 발생, 할 수 없이 조기 대선행보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점이 걸린다. 때 이른 승부수가 박 전 대표의 대권 전략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보궐선거 지원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친박계에서는 박 전 대표의 보궐선거 지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데, 만약 이번 보궐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박 전 대표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지난 2002년 대선 전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방선거 참패 뒤 극심한 후보교체론에 시달린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가 총선을 치르기도 전에 친이계의 견제 칼날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박계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번 선거에 올인해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번에 나경원 카드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마저 여당 후보를 지원하지 않고 뭉갤 명분이 전혀 없다. 몰릴 때까지 몰린 여당에게 최소한의 숨통은 틔워줘야 한다는 게 친박 측의 계산이다. 그래서 친박계에서는 “나경원 카드보다 더 나쁜 후보라고 해도 지원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후보는 누구라도 상관이 없고 어차피 도와줘야 할 국면이 됐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친박계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여당이 지금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에는 박 전 대표가 무조건 선거지원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물러나서 뒷짐 지고 비난받는 것보다 선거에 패배하는 게 훨씬 타격이 크다. 무조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나경원 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두고두고 ‘나경원 딜레마’에 빠져 고전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모두 ‘여성 정치인’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10-11면 박근혜-나경원 이미지 비교 기사 참조). 친박계에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나경원 카드가 나오자마자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여성 서울시장 후보와 여성 대선 후보의 중첩 이미지가 보수층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 최고위원이 서울시장에 당선이 된다면 ‘여성’이라는 카드가 한번 쓰여서 대선에서는 박 전 대표의 여성 약발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친박계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나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와 같은 여성이라는 점은 솔직히 부담이다. 나 최고위원이 첫 여성 서울시장이 되면 대선에서 여성을 한 번 더 선택할지 걱정이고, 반대 상황이면 ‘여성은 역시 안돼’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나 최고위원이 시장에 당선돼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박 전 대표에게는 득이 될 게 별로 없다는 견해도 있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나 최고위원이 시장에 당선돼 ‘죽을 쑬 경우’ 여론이 여성 정치인의 실패에 대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박 전 대표를 쉽게 당선시키지 않는 쪽으로 흐를 수 있다”라고 밝히면서 “그 반대의 경우에도 박 전 대표에게 유리할 건 별로 없다. 나 최고위원이 시정을 잘 이끌게 된다면 오히려 여성 정치인의 프리미엄을 나 최고가 가져가게 되고 ‘후배’와 비교돼봐야 본전인 박 전 대표로서는 더 큰 부담감으로 경직된 행보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친박계가 ‘나경원 카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조기 대권행보에 나섰지만 친박계 일각에서는 “너무 대세론만 믿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경원 변수를 정밀하게 체크하지 못한 채 일단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친박계는 박 전 대표의 서울시장 보선 개입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나경원 변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소탐대실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