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동구 곳곳에 구청장 선거 안내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곳은 박근혜-문재인 대리전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장훈 기자 |
한나라당 정의화 국회 부의장의 지역구인 부산 동구는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표밭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부산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반 한나라당’ 정서가 강하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정영석 후보는 30년간 공직생활로 쌓은 풍부한 행정능력을, 민주당 이해성 후보는 야권단일후보임을 내세우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문재인’이라는 두 거물들이 가세하면서 동구는 정치권의 뜨거운 도가니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부산동구 민심은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식어 있었다. 동구의 대표 재래시장인 수정시장과 초량시장에서 만난 많은 상인들은 하나같이 “진짜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푸념을 쏟아냈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음에도 시장은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손님이 없는 가게를 지키는 상인들은 파리를 쫓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횟집을 하는 상인은 “점심시간에도 손님이 없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주거환경, 교육, 복지 뭐 하나 좋아진 게 없다. 동구는 부산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돼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생선 좌판을 하는 상인도 “여기서 장사를 하며 애들을 다 키웠지만 요즘처럼 힘든 적은 처음”이라며 “나와 영감 두 사람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지만 자식 키우는 사람들은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 말했다.
부산의 민심은 상상 이상으로 냉담했다. “살려 달라”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이들 중에는 정권 책임론을 언급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유독 동구가 발전을 못하고 낙후된 것은 무능한 정치인들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눈앞으로 다가온 동구청장 선거로 흘러갔다. 시장 인근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노인은 아예 기자를 붙들고 하소연에 들어갔다.
“사실 우리 때는 당만 보고 찍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애들이 야당 찍는다 해도 ‘그래도 그러면 못 쓴다’며 뭐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안 그럴 거다. 그만큼 기대를 걸고 밀어줬으면 뭔가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젠 기대도 안 한다.”
대낮부터 가게 앞에서 막걸리 판을 벌이던 50대 남성들도 거들었다.
“한나라당이 너무 까불었다. 소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힘든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게 너무 괘씸하다. 그래도 ‘의리’ 하나로 한나라당에 희망을 걸었던 우리로서는 참담할 뿐이다.”
시민들을 많이 상대하는 택시기사들도 “부산이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한 번 바꿔봐야겠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는 것이다. 부산역 앞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한나라당이 아무리 미워도 민주당은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요즘 들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택시기사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결집하는 젊은 층들은 구세대들과 확실히 다르다. 어르신들은 ‘그래도 한나라당’이라며 미련을 못 버리지만 젊은이들은 부모의 정치색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돌아선다. 더 이상 ‘우리가 남이가?’라는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지역 내 여전히 여당에 대한 적극 지지층이 두텁게 산재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였다.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 중에는 여권을 향한 감정을 ‘증오’가 아닌 ‘애증’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들 한나라당 욕 엄청 한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당은 안 된다는 사람들이 많다.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척했지만 정작 서민을 우롱한 건 야당 아니었나. 투표를 안 하면 안했지 야당은 안 찍겠다는 이들이 있다. 한마디로 여당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애증이다. 애인이랑 헤어지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못 만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여당이 확실히 잘못하고 있기는 한데 그걸 빌미삼아 야당이 정권 심판 어쩌고저쩌고 하며 나대는 꼴은 더 보기 싫다. 흠집 내기에만 급급한 민주당은 왠지 신뢰가 안 간다.”
여야에 따르면 현재까지 이곳 판세는 오차범위 내 ‘박빙 혼전’을 보이고 있다. 후보별 선호도에서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여론조사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선거는 각 후보의 지원에 나선 박근혜 전 대표와 문재인 이사장 간 대결로 승부가 갈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구민들은 이번 선거와 관련, 이들의 영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실제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정영석 후보와 이해성 후보는 구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공약 외에도 자신들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선 두 잠룡들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정 후보 측은 ‘박근혜 효과’를 톡톡히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만난 60대 이상 주민들 중 상당수가 “한나라당이 잘하니 못하니 해도 박 전 대표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다. 섭섭하고 밉다고 해서 버리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일부는 “박 전 대표가 너무 몸 사린다고 얄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낮은 자세로 주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섭섭했던 마음이 풀어질 것 같다. 진정성이 느껴진다면 다시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믿어줄 때 잘했어야 했다. 한 번 돌아선 사람 마음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나라당은 알아야 한다. 이대로라면 박근혜 아니라 박근혜 할아버지가 와도 어려울 것이다. 이번엔 박 전 대표가 몸을 잔뜩 낮추고 진심으로 자성의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며 냉소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참여정부 대통령 홍보수석비서관 출신인 이 후보도 해볼 만하다는 입장이다. 부산을 정치적 고향으로 두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이 후보는 ‘정권 심판론’을 내세우며 승부수를 띄웠다.
부산 동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13대 총선에서 당선돼 정치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 수정시장의 한 젊은 상인은 “최근 반 한나라당 정서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이해성 후보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박 전 대표의 지원사격에 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도 나오지만 젊은 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문 이사장이 나선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나. 노무현-문재인 효과가 어느 정도는 먹힐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이날 기자가 만난 많은 주민들은 이번 동구청장 선거와 관련, 저마다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일부는 여당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토로하며 ‘절연’을 선언했다. 일부는 지금이라도 절박한 민심을 읽어줄 것을 호소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변화’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민들은 정치성향을 떠나 주거환경 개선 및 경제생활에 획기적이고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원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변심한 애인의 마음을 되돌리는 비책이, 민주당으로서는 옛 애인에게 상처받고 울고 있는 여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특단의 조치가 절박해보였다.
부산=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동구가 그들 텃밭?
1950년 제2대 국회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해 당선된 박 여사는 20여 년간의 정치인생 중 2·4·5·6·7대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박 여사는 농촌계몽과 여성인권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데, 특히 지역구 4선에 성공한 그녀의 활약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정치적 거물이었던 박 여사가 4·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지금도 노년층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박 여사의 정치활동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50년대 야당 여성 후보가 부산의 지역구에서 잇따라 당선됐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지 않느냐. 동구가 야당이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대대로 한나라당 표밭이었다거나 영남에서 민주당은 무조건 어렵다는 건 틀린 말이다. 여기 사람들은 특유의 곤조(근성)가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