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가운데 서울광장에 나온 박원순 후보와 야권 인사들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10·26 재·보선 결과가 범야권에 던지는 가장 큰 시사점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범야권이 총결집한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기대 이상의 큰 표차로 승리했지만 민주당과 민노당 후보가 동시에 출전한 강원 인제군수 선거에선 예상과 달리 패하고 말았다.
시사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서울시장 선거처럼 범야권이 똘똘 뭉쳐 뛰어들었던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선 15%포인트가 넘는 큰 차이로 패했다. ‘더 이상 민주당 간판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두 가지 시사점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만한 범여권 정당과 인사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대목이 있다. 뭉치기는 뭉치되, 어떻게 뭉치느냐의 문제가 그것이다.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은 범야권이 하나의 정당으로 합쳐 반 한나라당 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대 통합론’을 펴고 있다.
반면 민노당과 진보신당, 참여당은 “민주당은 연대의 대상일 뿐 통합 대상은 아니다”며 자기들끼리 ‘소 통합 후 선거연합론’을 추진하고 있다. 양측 사이의 의견차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민주당 일각에서는 우선 가능한 세력들끼리 합치고 진보정당은 나중에 통합하자는 ‘단계적 통합론’도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쪽은 대 통합론이다. 이번 재·보선에서 부산 동구청장 선거를 자기 선거처럼 치렀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선거 패배 후 “야권 대통합만이 유효적절한 대안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호남, 특히 부산에서 민주당이 갖는 한계를 확인했다”며 “부산에서 민주당의 지역적 한계는 민주당만의 힘으로는 넘어서기 힘들며 대통합으로 함께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는 문 이사장이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는 선거 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한 소회를 담은 발언이다. 실제로 부산 동구청장 선거 지원에 나섰던 한 친노그룹 인사는 “이해성 후보와 함께 지역을 다니는데 지역 주민이 ‘왜 2번(민주당 기호)으로 나왔노? 차라리 박원순이처럼 무소속으로 나오지’ 하더라. 민주당 간판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민주당 야권통합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인영 최고위원도 “대통합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 최고위원은 민노당 등의 소통합 후 선거연합 주장에 대해 “서울시장 자리는 하나이지만 내년 총선에선 243개의 지역구에 후보를 내야 한다”며 “이번처럼 후보단일화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이 최고위원은 범야권 제 정당과 세력들이 대통합정당으로 통합하되 그 안에서 정파 연합 식으로 독립성과 지분을 유지하는 ‘연합정당론’을 펴고 있다.
현실정치에 발을 담근 상황은 아니지만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대통합론을 지지한다. 조 교수는 선거 승리 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의 선택은 그의 몫. 오히려 우리의 몫이 더 중요하다. ‘안풍(안철수 바람)’을 받아 ‘전기’를 만들려면 우리 각자가 ‘제너레이터’가 돼야 한다. 그래서 거대한 ‘풍력발전소’를 만들어야 한다. 제너레이터 없이 바람은 전기로 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다른 자리에서도 “내년 초까지 진보진영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이 탄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력 면에선 대 통합론이 우세하지만 민주당에 흡수될 것을 우려하는 진보정당들의 반대 기류는 여전히 막강하다. 범야권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중심의 한 그룹과 진보정당 그룹으로 두 살림을 차릴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안철수 원장을 정점으로 한 제3신당 추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컨설팅업체 e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안 원장이 신당 창당에 나설 경우 그 신당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정당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범야권의 세력 재편이 한층 더 복잡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박원순 서울시장의 역할론에 관심이 쏠린다. 진보 시민사회에 대한 영향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박 시장이 범야권 통합 과정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에 따라 대 통합론과 소 통합론의 세력 관계에 변화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박 시장은 대 통합론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모양새다. 그는 시장 당선 후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찾아간 자리에서 “지금 일부 언론에서는 제가 한 번도 말하지도 않았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제3 정당론’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따라갔지, 민주당과의 경선을 했겠습니까? 민주주의를 지켜온 민주당을 중심으로, 다른 야권이 통합하고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흡수하고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배어 있는 발언이다.
민주당에 대한 박 시장의 신뢰와 존중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시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을 때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 도전을 위해 민주당 입당을 타진했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우리에겐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있었기 때문에 박 변호사의 입당이 무산됐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여러 문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민주주의와 복지, 남북관계 등에서 일궈 온 성과와 전통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 시장은 또 이번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시장 선거캠프에 참여했던 한 민주당 인사는 “처음엔 캠프 운영이 박 시장과 오래 전부터 함께 해 온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점차 민주당 인사들이 주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나경원 후보 측과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박 시장이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에게 적잖이 실망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나 후보 측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양상이었던 박 후보 측은 이인영 상임선대본부장과 우상호 공동대변인, 박선숙 특보 등 민주당 출신의 ‘선거 베테랑’들이 결합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강남 1억 원짜리 피부관리, 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 등 유권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역공세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초기 대변인으로 활약한 송호창 변호사, 인터넷을 담당했던 유창주 전 아름다운재단 사무처장,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 김창희 전 프레시안 편집국장 등 초기 박원순 캠프의 핵심 인력들의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현실정치로 뛰어든 박 시장으로선 민주당을 맏형으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민주당과 함께 야권의 통합과 혁신의 길에 함께하겠다”는 박 시장의 말이 한결 더 의미심장하게 들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박공헌 언론인
10·26 재·보궐선거에서 ‘안풍(안철수 바람)’에 강타당한 것은 청와대와 한나라당만이 아니다. 손학규 대표, 정동영·정세균 최고위원 등 민주당 대선주자들 역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등장 이후 ‘존재감 상실’이라는 말을 절감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10월 셋째주(17~21일) 정례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을 물은 결과 손 대표는 4.7%로 4위에 그쳤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8.9%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안철수 원장이 21.5%,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9.6%로 그 뒤를 이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2.5%의 지지를 얻어 9위에 그쳤다. 오차범위 안에 있기는 했지만 유시민(3.7%) 국민참여당 대표와 한명숙(3.6%) 전 국무총리는 물론 김문수(3.2%) 경지지사, 이회창(2.8%) 전 자유선진당 대표에게도 밀렸다. 정세균 최고위원은 조사 대상 10명에도 들지 못했다.
이들 세 사람의 더 큰 고민은 앞으로 ‘반등 포인트’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아직 폭발 단계는 아니지만 당내에선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호남을 빼곤 전패한 데 대한 ‘지도부 책임론’이 일고 있다. 특히 10월 3일 서울시장 범야권 경선 패배 후 ‘사퇴 파동’을 일으켰던 손 대표는 의원들뿐 아니라 당원들에게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지금으로선 손 대표를 비롯한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민주당을 질서 있게 범야권 대통합의 길로 이끄는 것뿐이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전통적인 민주당원, 현역 의원들 사이에선 “왜 민주당이 ‘깜’도 안 되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과 함께 ‘n분의 1’로 통합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통합 과정에서 민주당의 지분 챙기기에 나섰다간 구태정치인으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다가오는 겨울은 이들에게 더없이 혹독한 계절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