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처들도 블랙리스트 문서 작성 의혹…혐의 나올 경우 문재인 정부 도덕성 치명타
‘소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윤석열 사단’이 요직에 발탁되면서 다시 특수통 전성시대가 열렸다.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 이원석 대검 차장, 신자용 법무부 검찰국장, 권순정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양석조 서울남부지검장, 김유철 대검 공공수사부장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때 좌천되거나 한직을 맴돌다 새 정부 출범 후 승진 발탁되며 부활했다.
특수통 검사들은 수사를 하기 전 큰 틀을 짜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히들 ‘그림을 그려놓는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수사를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한 후 이 퍼즐을 맞춰 목표를 향해 가는 방식이다. 특수통 출신 한 변호사는 “(특수)부장이 밑에 검사들에게 사건을 배당한다. 내가 맡은 수사를 다 하고 나서야 이게 큰 사건의 한 부분이었다는 걸 알았던 적이 많다”면서 “과거 큰 게이트 사건의 초반을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수통들이 주도할 문재인 정부 수사의 큰 그림을 알아보기 위해선 최근 일련의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2년여 전 폐지됐던 서울 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합수단) 설치,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다. 합수단은 라임, 옵티머스, 신라젠 등 문재인 정부 때 벌어진 사건들을 재수사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동부지검의 산업부 블랙리스트 역시 문재인 정부 때의 일이다.
언급된 사건들의 공통점은 문재인 정부 실세들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이다. 사건에 연루됐거나 또는 추후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지금은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이런 사건들에 대한 수사를 막고 덮기 위해 지난 정권이 검찰의 힘을 빼려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다시 ‘칼’을 잡은 검찰이 이 건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 결국 종착지는 거대 야당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배경이다.
산업부는 일찌감치 윤석열 정부의 ‘1호 수사’ 대상이 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들과 갈등을 빚던 검찰총장 시절부터 산업부 원전 수사에 애착을 보였다. 추미애 전 장관으로부터 직무정지 조치를 당한 후 복귀 첫 지시도 원전 수사였다.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 캠프에 유독 원전 관련 제보가 쏟아졌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관련기사 검찰발 ‘파일’은 파이프라인을 타고…공직사회 ‘윤석열 줄대기’ 실상).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는 2019년 1월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산업부가 산하 기관장들을 압박해 사표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지지부진했던 수사는 정권 교체 후인 2022년 3월 급물살을 탔다. 검찰은 3월 28일 산업부를, 5월 20일엔 백운규 전 장관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백 전 장관 소환 조사만 남은 상태인데, 그 결과에 따라 청와대 등 윗선의 개입 여부가 판가름 날 전망이다.
블랙리스트 수사팀은 대전지검이 진행했던 원전 감사 무마 자료 등도 넘겨받아 분석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탈원전 정책에 반대했던 인사들을 내치거나 교체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는 블랙리스트 수사와 원전 수사가 맞닿아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산업부 수사가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사정 정국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두고 박범계 전 법무부 장관은 “참 빠르네”라는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에서도 ‘정치보복’이란 말이 쏟아졌다. 백 전 장관 다음 수사 대상이 문재인 청와대의 인사 파트가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자 당혹감도 감지된다. 한 민주당 의원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때도 검찰은 청와대 관여설을 흘렸지만 결국 입증하지 못했다”면서 “정권이 바뀌자마자 나타나는 이런 행태가 검찰개혁의 당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과 검찰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는 외압에 의해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 한 재선 의원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기소하긴 했지만, 그 윗선 규명엔 실패했다. 장관 혼자 독단으로 했다는 게 납득이 가느냐”고 반문하면서 “왜 수사가 반쪽이 됐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 후 사실상 좌천인사를 당해 사표를 냈던 주진우 변호사는 윤석열 캠프를 거쳐 현재 대통령실 법률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 정부 사정당국 최고위급 인사는 사석에서 “블랙리스트가 산업부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파악됐다. 환경부나 산업부도 그렇고, 조직적인 지시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 증명할 문서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산업부가 아닌,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로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인사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A 씨를 몸통으로 보고 있다. 환경부 수사 때도 그의 이름이 나왔었다”고 덧붙였다.
이 인사와 복수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환경부와 산업부뿐 아니라 또 다른 부처, 기관에서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문서를 확보했다고 한다. 검찰 등은 이런 문서 작성에 A 씨가 개입했을 것으로 본다. 동부지검이 백 전 장관 조사 후에 A 씨를 부를 것이란 말도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취재 결과, A 씨와 함께 민정수석실에 몸담았던 청와대 전 직원이 최근 한 차례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블랙리스트 수사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만약 청와대가 연루된 정황이 나온다면 문재인 정부 도덕성에 치명타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때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적폐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청산에 나선 바 있다. 역으로 여권으로선 지난 정부에 대한 보복 수사 프레임을 불식시키기 위한 명분 확보 차원에서도 블랙리스트 수사가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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